A대학 연구소장을 겸임하고 있는 L교수는 연초만 되면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연구소가 한 해동안 수행할 외부 프로젝트 때문이다.
L교수는 마치 영업사원처럼 이 기업, 저 기업에 구걸하다시피하는 상황이 썩 내키지 않지만 연구소의 존폐를 위해서는 부지런히 전화통을 붙잡을 수밖에 없다. 연구소의 경쟁력을 프로젝트 수주 규모에 의존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별 뾰족한 대안이 없어 애만 태울 따름이다. L교수는 이런 분위기에서 연구소에 맞는 과제보다는 일단 따 놓고 보자는 마음이 앞설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다. 이렇게 딴 연구 프로젝트가 얼마나 성의있게 진행될지 역시 걱정이 앞선다고 토로한다.
그는 “그나마 이름이 알려진 서울소재 대학은 기업에서 의뢰하는 연구 건수라도 있지, 지방이나 신생 대학 연구소는 이중·삼중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내실있는 산학 협동과 고급 대학 연구소 인력은 아직도 먼 이야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처럼 대학 연구소의 위상 흔들림과 함께 연구소를 운영하는 인력들도 기초연구에 에너지를 집중하기보다는 프로젝트 수행에 급급해하고 있다. 연구소가 양적으로는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지만 이 때문에 인력·인프라 등 질적인 면에서는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목소리가 높은 실정이다.
지식기반 사회로 넘어가면서 대학은 교육을 통한 인력양성 외에 연구활동을 통한 지식생산 및 연구성과의 산업 이전을 요구받고 있지만 정작 이 역할을 수행할 연구소는 60, 70년대 수준에 그치면서 한국을 세계 일류 국가로 끌어올리는 데 일조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연구소에 들어온 고급 인력들도 목표를 잃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한 유명 대학교의 경우 학교에 등록된 연구소와 연구센터만도 50여개에 달한다. 산업과학연구소, 경제연구소, 자연과학연구소 등 언뜻 분야를 짐작하기 힘든 연구소에서 시작해 디스플레이공학연구소, 자동차전자제어연구소 등 전문 연구소까지 다양하다. 이 중 나름대로 연구원에서 관리 직원까지 체계를 갖춘 연구소도 있지만 덜렁 연구소장이 홀로 연구소를 운영하는 ‘나 홀로 연구소’도 있다.
다른 대학도 사정은 비슷하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국립대를 포함한 종합 대학의 경우 평균 40, 50개의 연구소가 있는 것으로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이렇게 연구소가 늘어난 데는 물론 연구 중심 대학, 학부제 실시, BK21 사업과 같은 정부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연구소 설립이 그만큼 수월하다는 점 때문이다. 학교와 연구소가 따로 분리돼 간단한 서류만으로 연구소를 만들 수 있다. 대신 연구소 운영은 독립적이다. 학교의 별다른 지원이 없으며 연구소장을 중심으로 한 연구원들이 알아서 한해 살림을 꾸려가야 한다. 이 때문에 매년 연구소장은 고급 인력을 키우고 양성하기보다는 연구과제와 연구비를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
대학 연구소의 양적인 성장 덕분에 연구비 역시 매년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일례로 지난 99년 국내 이공계 대학이 사용한 연구비는 1조4314억원 규모였다. 사상 처음으로 출연기관이 사용한 연구비 1조3653억원을 근소한 차이로 앞질렀다. 연구개발 예산안에서 대학 연구지원 사업의 연구비중도 2% 증가했다. 국내 기업에서 대학으로 유입되는 연구비도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으며 대학이 중소기업의 최대 기술협력 대상으로 부상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가 국제 논문 발표수(SCI) 증가율 세계 1위를 차지한 데는 이 같은 연구소의 양적 성장에 기인한 바 크다.
그러나 인력 등 질적인 면에서는 선진국과 비교해 아직도 초라한 실정이다. 미국·유럽 등과 비교해 대학 연구 시스템은 아직 개선·발전시켜야 할 여지가 많다. 그래야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인력도 보람을 갖고 근무하며 또 이는 크게는 국가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진다.
전문가들은 연구소의 질적 성장을 가로막는 첫째 요소로 연구풍토 낙후를 들고 있다. 지금과 같은 체제에서는 연구소가 알아서 ‘살림살이’를 꾸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연구 기자재는 물론 연구비, 연구원들 숙식까지도 연구소의 몫이다. 연구진들이 예산확보를 위해 외부 과제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학협동 차원의 내실있는 연구도 진행하기가 녹록지 않다. 연구소 예산이 충분하지 못하다 보니 체계적인 연구소 운영은 아예 처음부터 생각조차 하기 힘들다.
공동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시스템 역시 걸림돌이다. 산학 협력 차원에서 기업과 대학은 커뮤니케이션이 있지만 대학내 같은 연구소, 다른 대학과의 공동연구는 꿈도 못꾸는 상황이다. 그 만큼 연구소끼리 서로 배타적이라는 방증이다. 공동 연구가 전무하다 보니 연구소 혹은 대학별 중복과제가 부지기수다. 연구 성과도 제대로 축적되지 못하고 있다.
연구소의 검증 시스템도 다시 한번 점검해야 할 대목이다. 학교는 부실 연구소를 막기 위해 매년 평가제도를 운영하지만 다분히 형식적인 작업에 그치고 있다. 한 대학의 연구원은 “연구소의 양적 성장 만큼 질적 성장을 위해서는 예산 지원이나 공동 연구 등도 필요하지만 제대로 된 평가 시스템을 마련해 경쟁력 있는 연구소와 연구원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적 정보기술 메카로 각광받는 실리콘밸리가 명성을 얻은 데는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 시스템과 고급 두뇌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 MIT 대학의 견실한 산학 연구와 우수한 인력 덕분에 미국의 신경제는 빛을 볼 수 있었다. 100여년 가까이 연구 중심 대학으로 성장해 온 선진국의 연구시스템과 우리를 절대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수한 대학 연구 인력 양성없이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글로벌사회에서 우리가 세계속에서 우뚝서기는 언감생심이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