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대로라면 올해 말까지 금융기관 100여곳이 새롭게 재해복구 채비를 갖춘다. 지난해 9·11테러 후 금융감독원이 권고한 시한에 맞춰 연말까지 기준에 부합하는 재해복구센터(DRS)를 갖추겠다고 밝힌 곳을 추산한 결과다. 지난해 이후 50여곳이 DRS를 구축했거나 추진 중으로 거의 배 가까운 규모가 석달여만에 진행되는 셈이다. 정부의 방침과 금융기관 자체 계획이 순조롭게 추진된다면 연말까지는 DRS 프로젝트가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계획일뿐 금융권 DRS 정비가 제대로 진행될지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다. 서울은행 비즈니스상시운용체계(BCP)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사례. 최고 수준의 DRS 환경을 갖추기로 했던 서울은행의 BCP 프로젝트는 하반기 들어 완전 실종돼 버렸다. 은행 주인이 바뀌는 매각작업이 목전에 걸려있어 웬만한 프로젝트는 ‘올스톱’으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누가 주인이 되는지와는 무관하게 은행이 고유의 업무에 충실하기 위해선 BCP는 앞으로 필수과목. 당초 지난 6월부터 사업에 착수하려고 했던 서울은행의 BCP 프로젝트 중단 사례는 현재 DRS를 대하는 금융권의 현주소다. 현재 은행권으로 분류되는 곳 가운데 서울은행을 포함해 한미·제일·수협·농협 등 아직도 상당수 기관은 금융감독원 권고기준(3시간)에 못 미치는 24시간 이내 재해복구 환경에 머물고 있다.
9·11 뉴욕 테러사건을 계기로 금융권에 유행처럼 번졌던 DRS에 대한 관심이 요즘 들어 당초 의지에 못 미치는 분위기다. 불과 1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DRS 도입열기는 사그라지고 있다. 이런저런 다급한 현안과 고질적인 ‘재해불감증’이 이유다. 금융 당국의 강력한 의지도 힘을 잃고 있다. 지난달 금융정보화추진위원회는 은행과 증권사는 3시간 이내, 보험사는 24시간 이내 재해복구체제를 완비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오는 2006년까지 매년 1000억원을 투입해 단계적으로 실시간 백업체제로의 전환을 추진하겠다는 구상. 지난해 10월 금감원이 올해 말까지 190여개 금융기관들은 DRS를 의무적으로 도입토록 했던 당초 계획과 비교하면 크게 물러선 일정이다.
올들어 실시간 풀 미러링 방식의 재해복구시스템을 도입했거나 추진 중인 은행권은 한국산업은행·기업은행·우체국 등이다. 산업은행은 계정계·정보계 등 전 업무에 적용했다는 점에서, 기업은행은 차세대 시스템 전환작업과 동시에 기능향상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각각 의미가 있다. 증권업계에선 증권거래소가 주식매매체결시스템의 DRS를 지난 3월 구축 완료해 거래소·코스닥시장의 안정적인 백업환경을 갖췄다. 삼성증권은 본사 소재 백업센터를 지난 3월 서초동으로 이관하면서 실시간 백업환경을 완비했고, LG투자증권은 지난 7월 원격지 백업센터를 구축해 가동에 들어갔다. 이밖에 현대·동원·한화·교보·우리·미래에셋증권 등도 각각 연말까지 DR 도입을 추진 중이며, 증권전산은 30여개 중소형 증권사를 대상으로 연내 공동 백업 환경을 구비하기로 했다. 카드사 가운데는 LG·삼성이 지난해 DRS를 도입한 데 이어 지난 7월 외환카드가 실시간 풀 미러링 방식의 시스템 가동에 들어갔고, 국민카드도 현재 추진 중이다. 생명보험업계에서는 SK·교보생명이 연말을 목표로 DR 도입을 진행 중이며, 손보업계 처음으로 삼성화재가 지난 6월 실시간 미러링 방식의 DRS 채비를 갖췄다. 보험개발원은 그린·대한·동양·서울보증·신동아·쌍용·제일화재 등 중소형사들을 모아 공동 백업센터 구축작업을 진행 중이지만 아직까지 비용산정 및 분담문제로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서한기자 hs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