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에서 통일행사가 열립니다.’
연세대 학생회관에 드리워진 현수막. 대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학생회 주최 행사 안내라 무심코 지나칠 찰나 현수막 끝자락에 적혀 있는 인터넷 주소 ‘www.kgs.wo.ro’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보니 동아리 모임안내 포스터부터 각종 아르바이트 모집, 하숙집 구함 안내에 이르기까지 인터넷 주소와 e메일 주소가 빠진 곳이 없다.
시간과 장소를 적지 않고 행사안내라고 하면 말이 안되는 것처럼 e메일 주소와 홈페이지 주소는 어느 행사 알림에나 붙어있다. 이 정도는 대학생활에 깊숙이 파고든 IT문화를 알리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대학생들의 하루일과는 컴퓨터와 인터넷 없이는 설명할 수 없고 IT는 이들의 문화마저도 바꿔놓았다.
인터뷰에 참석한 연세대 신방과 최원혁(97학번)·이지선(99학번)·곽경미(99학번) 학생들도 자신들의 하루생활을 말하고 나더니 “너무 익숙해져서 몰랐는데 정말 IT가 생활 깊숙이 파고 들었네요”라며 입을 모았다.
07:00 집
컴퓨터에서 흘러나오는 윈엠프나 MP3를 들으면서 잠에서 깬다. 아침뉴스 보러 굳이 거실에 나가지 않는다. TV수신카드가 장착된 컴퓨터로 방에서 보기 때문이다.
저작권문제로 폐쇄조치를 받은 소리바다 서비스가 재개된 것에 대해서도 새삼스러운 뉴스가 아니라는 반응이다. 이지선양은 “검색을 통해 다운로드한 MP3로 음악을 듣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라 당연히 재개될 줄 알았다”면서 “그걸 새삼스러워하면 오히려 이상하죠”라고 말했다. 이들에게 소리바다를 이용하지 말라는 것은 노래를 듣지 말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얘기.
10:00
아침 10시 수업인 ‘설득이론’은 사이버 강의다. 요즘 2시간 오프라인 강의에 1시간 사이버 강의를 붙인 3학점짜리 강의가 대유행이다. 10시가 되자 해당 사이트에 학생들이 속속 접속해 출석체크를 하고 강의를 듣는다. 과제물도 온라인으로 올리고 질문과 토론도 온라인상에서 이뤄진다.
곽경미양은 “오프라인 강의 때는 질문도 별로 안했지만 사이버 강의땐 달라진다”며 “예민한 문제에 대해서도 과감히 질문하고 교수는 물론 학생들의 의견도 동시다발적로 이어진다”고 온오프라인 강의 차이점을 지적했다.
“군대에 갔다 복학한 지난해는 사이버 강의에 적응하기 정말 힘들었습니다. 수업 참여도가 금방 표시나니까 게시판에 글도 많이 올려야 되죠. 참고자료도 찾아서 친구들과 공유해야 합니다. 교수님이 자료실에 올리는 자료의 양도 만만치 않고요. 사이버 강의 1시간은 오프라인 강의 4시간에 맞먹습니다.” 최원혁군은 복학 후 사이버 강의에 적응하기까지의 과정을 이렇게 고백했다. 실제로 과게시판에는 ‘어리버리 복학생’ 도와달라는 제목의 게시판이 적지않게 눈에 띈다.
12:00 학교 도착
3시 수업을 같이 들을 친구와 학생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간다. 이때 없어서는 안될 것이 다기능 복합 ID카드다. 교통카드·은행직불카드로도 유용한 이 카드에는 전자화폐 충전기능이 있어 식권을 따로 살 필요가 없다. 카드리더에 카드를 대기만 하면 지불 완료다. 복사할 때, 간식을 먹을 때, 도서관에서 책 빌릴 때 등 학교에서 돈이 들거나 자신의 신원을 입력해야 하는 일에는 ID카드 하나면 언제나 오케이다. 깜박 잊고 안 가져오는 날에는 버스를 탈 때부터 학교 생활 곳곳에서 잔돈 챙기기가 원래부터 이렇게 힘들었던가 새삼 느껴야 한다.
15:00
대형 강의실에서 열리는 교양강의 ‘프랑스문화사’ 시간이다. 대형 강의실에 모여든 300∼400명 학생들을 일일이 출석체크하느라 진땀 흘렸던 80∼90년대 초반 조교들이 가장 신기해 할 소식이다. 이른바 전자출석. 강의실 입구 카드리더에 ID카드를 대면 출석체크가 된다. 물론 남의 ID카드까지 가져와 대리 전자출석하거나 ID만 찍고 몰래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조교들은 깜짝 오프라인 출석체크도 예고없이 실시해야 한다.
프랑스문화사가 수백명 수강생들을 몰고다닐 정도로 인기가 많은 이유로 멀티미디어 수업이라는 점을 꼽았다. 영화나 뉴스를 그대로 가져와 강의를 흥미롭게 응용하는 이른바 멀티미디어형 교수들이 뜨고 있다는 것. 최군은 “학생들도 뛰어난 컴퓨터 실력으로 멀티미디어 리포트를 작성해오는 게 일반화되고 있다”면서 “특히 경영학과 학생들의 프레젠테이션 자료는 화려하기까지 하다”고 설명했다.
17:00
학교 컴퓨터실은 늘려도 늘려도 부족하고 시간과 때를 가릴 것이 없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댄다. 리포트 마무리하는 사람들, 음악듣는 사람들, 채팅하는 사람들, 인터넷 서핑하는 사람들로 언제나 초만원이다. 늦은 오후에는 동아리 친구들이 꼭 쪽지를 날리거나 번개팅을 공지해놓기 때문에 컴퓨터실에 들려 돌아가는 상황을 체크하는 게 버릇이 됐다. 동아리 게시판에 들어갔더니 ‘XX선배 휴가 나왔음, 신촌 OO호프에서 번개’라는 공지사항이 깜박깜박 뜬다. 이정도 중요한 소식이면 굳이 게시판을 확인해보지 않아도 휴대폰 문자메시지(선배가 올 꺼냐고 보낸 메시지, 동아리에서 보낸 휴대폰 단체쪽지, 친구가 같이 가자고 보낸 메시지)로 이미 진동소리가 요란하다.
19:00
군복무 중이라 오랜만에 사회에 나온 선배에게 특별히 전해줄 새로운 소식이 없다. 선배가 며칠 새 동아리 게시판을 통해 주요 행사와 사건들을 이미 접수한 상태이기 때문. 그런 선배에게 익숙한 제안 하나를 관례처럼 한다. “형, 오랜만에 나왔으니 저녁먹고 스타 한판해야죠.”
21:00
스타도 스타지만 특히 밤 9시에 ‘언론과 정보사회’ 시간 조모임 정팅(시간을 정해놓고 인터넷에서 만남)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컴퓨터에 접속해야 하기에 PC방을 찾았다. 조모임이란 조를 구성해 과제물을 해결하기 위해 만나는 모임이다. 90년대 중후반만 해도 학교 잔디밭에 모여 조모임을 하는 경우 많았으나 조모임마저도 온라인으로 옮겨간지 오래다. 인터넷에 조모임 카페를 만들고 정팅을 통해 과제물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자료도 공유한다.
23:00
집에 들어와서도 TV는 안켜도 컴퓨터와 인터넷은 끼고 살아야 한다. 리포트를 쓸 때도 책·인터넷·메신저 등 세 가지는 항상 오픈된 상태다. 인터넷으로 TV 프로 다시보고, 채팅하고, 공동구매를 하는 등 인터넷 서핑을 하다보면 12시를 훌쩍 넘기는 것은 기본. 무한한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 아무리 클릭품을 팔아도 그 끝과 깊이를 체험하기에는 밤이 짧다.
이들의 이야기를 다 들은 기자가 “도대체 컴퓨터가 없으면 뭐하고 있어요”라고 다소 근원적인(?) 질문을 했다. “뭐하긴 뭐해요, 아무것도 못하죠.” 이양의 대답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대학가 달라진 풍속도 ■
◇교내에서는 네티켓, 교외에서는 사이버테러
각 수업마다 인터넷 게시판이 열려있고 동아리, 조모임, 각종 친목모임 등등 인터넷 게시판이 쏟아지면서 익명 게시판은 점점 없어지는 추세. 감정적인 글이나 남을 근거없이 헐뜯고 비방하는 글이 삭제되는 것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네티켓은 단지 교내에서만 지켜지는 일일뿐. 학교 밖만 나서면 익명 게시판이 난무하고 이른바 ‘인터넷 훌리건’이 떼지어 몰려가 사이트를 마비시키는 것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당구가 뭐예요. 선배
97학번 이후로 당구를 칠 줄 아는 대학생들이 거의 없어지고 있다는 다소 충격적인 소식이다. 이에 따라 대학가에는 당구장은 점점 사라지고 그 자리에 PC방, DVD방들이 새롭게 채워졌다. 현란한 손놀림으로 스타크래프트를 즐기거나 DVD방에서 공연실황을 같이 감상하는 일은 이제 익숙한 광경이다.
◇번개팅·정팅·채팅으로 전방위 만남 시도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의 만남의 방식은 친구의 친구를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는 소개팅과 미팅이 주를 이뤘다. 90년대 중반 PC통신 시대가 열리고 90년대 말 이후 인터넷 채팅이 본격화되면서 이제 대학생들의 만남은 뚜렷한 방향성이 없어졌다. 밤새 채팅하다 보면 사법연수원도, 자장면 배달원도 만나게 되고 이는 오프라인으로까지 연결된다. 이러한 만남에 재미를 붙인 몇몇은 번개팅 중독이라는 신종 사회병에 걸리기도 한다.
◇종이는 인터넷과 함께 사라지다
이제 강의시간에 교수님이 정성스럽게 나눠주던 복사물은 없어졌다. 수업과 관련된 자료는 누가 묻지 않아도 족보(수년간 꼭 출제되는 시험내용을 지칭하는 은어)까지 포함해서 인터넷에 다 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각종 교내정보, 취업정보 등도 인터넷으로 확인한다. 대학생 문화의 상징이었던 대자보도 점차 자취가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대학생활, 집에서 100% 해결하기에 도전한다
수강신청부터 사이버 강의에 이르기까지 인터넷만 연결되면 집에서도 할 수 있다. 집에서 도서관 자료를 검색할 수 도 있고 논문자료도 열람할 수 있다. 성적표 확인과 등록금 납부도 인터넷으로 가능하다. 학교에 갈 필요없이 집에서 해결할 수 있는 대학생활의 범위가 급속히 커지고 있다.
◇MT가도 노트북 들고 간다
줄잡아 대학생 중 50∼60%가 노트북을 갖고 있다. 도서관에서는 어디에서나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노트북용 랜카드를 대여해준다. 심지어 MT를 갈 때도 노트북을 들고 간다. 세미나 자료나 각종 자료를 담아둘 수 있고 음악을 틀거나 게임을 하기에도 이만큼 편리한 게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카메라도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MT 가서 찍은 사진은 그날 바로 동아리 게시판에 속속 올라온다. 유료 랜선이 구비돼 있는 신종카페도 늘고 있다.
◇할인표 못 구하면 부자이거나 바보이거나
영화를 제값 주고 보거나 패밀리레스토랑에 제돈 다 내고 식사하면 뭔가 억울한 느낌을 갖는 게 요즘 대학생들이다. 정보의 바다에서 매일 열두번도 더 헤엄치는 이들은 보고싶은 영화면 반드시 그 영화 시사회표를 구하고, 각종 음식점 할인 쿠폰도 미리미리 구해놓는 게 습관이 돼 있다. 이에 따라 예매문화도 자리잡혀가는 게 사실.
◇통신업체들이 만든 오프라인 공간 대흥행
통신업체들이 마련한 오프라인 공간(TTL·NA·Khai존)은 대학생들의 주무대 중 하나가 됐다. 대학생들이 이 공간에 몰려오는 이유를 굳이 분석하자면 휴대폰·인터넷·무료라는 3박자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