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판매된 PDA는 20만대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실제 사용자수를 따지면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판매대수와 실제사용자수가 이렇게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PDA 마니아들이나 디지털기기 얼리어답터(신제품을 빨리 구매하려는 성향을 지난 사람)들이 신종 PDA가 나오면 속속 구매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3∼4개 PDA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회사원인 최준혁씨(34)도 “최대 11대까지 PDA를 소유한 적이 있었다”면서 “조금 부풀려 말하면 가산탕진할 뻔했다”고 고백했다.
PC부터 디지털카메라, AV, DVD, PDA 등 첨단기능을 장착한 각종 IT제품들이 쏟아지면서 이른바 얼리어답터와 IT 마니아들도 늘어가고 있다. 이들은 그야말로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면서’ 틈틈이 모은 돈을 자신들의 관심 제품에 아낌없이 투자한다.
얼리어답터라는 개념이 처음 소개된 것은 4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 지난 57년 출간된 에버릿 로저스의 ‘혁신의 보급’이라는 책에서다. 90년대 중후반 반도체 기술이 급속히 발전되고 고기능·다기능 하이테크 제품이 시장에 쉴새없이 나오면서 얼리어답터라는 개념은 다시 주목받게 됐고 로저스의 책도 95년 재판본까지 나오게 됐다. 요즘들어 IT제품의 마니아가 늘게 된 것도 기술향상 속도가 빨라지면서 제품이 다양해지고 고기능화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전문가들은 얼리어답터나 마니아들은 개발자 혹은 혁신자라고 불리는 계층과 구분돼야 한다고 말한다. 개발자들은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고 그 기술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간직하는 데 반해 얼리어답터나 마니아들은 주위사람들에게 어떤 제품이 왜 좋은지 설명하고 정보를 공유하려는 특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품에 관한 한 그들은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한다.
◇인터넷으로 영향력 더욱 커져=인터넷은 얼리어답터나 마니아에게 커다란 확성기를 가져다준 셈이 됐다. 친구나 동료들이 물어보던 수준에서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전국적인 규모로 그들의 의견을 참조하기 때문이다. 얼리어답터나 마니아들이 만든 각종 사이트들은 입소문이 퍼지면서 웬만한 기업도 보유하기 힘든 방대한 자료와 세세한 제품 평가로 이름을 날린다. 그뿐인가. 이들의 전문성과 영향력을 인정한 기업들이 베타테스터로 모셔가거나 신제품 기획회의에 참여를 부탁하기도 한다.
각종 아이디어 상품과 첨단제품을 소개하는 얼리어답터(http://www.earlyadopter.co.kr)의 최문규 사장은 회원 가운데 삼성전자, LG전자 등 대기업 연구원도 다수 있으며 이들 업체의 마케팅, 개발회의에 참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PDA 전문사이트 PDA벤치(http://www.pdabench.co.kr)을 운영하는 김병윤 사장도 자사 사이트 운영진이 PDA관련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개발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관련 시행령까지 바꾼 사례도 있다. DVD 마니아들이 운집해 있는 DVD프라임(http://www.dvdprime.com)에서는 지난해 12월 20세기폭스사 등 미국 유수의 배급업체가 한국에서 판매하는 DVD의 스페셜 에디션(본영화 이외에 부가영상물)에 한글자막을 넣지 않은 데 대한 마니아들의 항의로 문화부가 관련 시행령을 개정하기에 이르렀다. 불량 제품 리콜요청, 터무니없이 높게 매겨진 제품 가격 인하운동 등도 적지 않게 일어난다.
이들 사이트에서 생겨난 독특한 문화가 사회 전체에 파급효과를 미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디지털카메라 마니아들이 모여 있는 디시인사이드(http://www.dcinside.co.kr)다. 이 사이트 회원들은 ‘아햏햏, 쌔우다, 방법하다’ 등 현대 국어문법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언어를 사이버세계에 유행시키고 있다.
또 전문가 빰치는 이들의 행보는 투잡스족(두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 시대를 예고한다. 마니아들이나 얼리어답터들은 회사원, 학생, 의사 등 자신의 직업을 유지하면서도 각종 언론매체의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기도 하는가 하면 전문적인 베타테스터를 넘어서서 개발자로 참여하기도 한다. 인터넷을 통해 조그마한 쇼핑몰을 개설하는 등 부업을 하는 사례로 흔히 볼 수 있다.
◇소비의 미덕은 산업을 키우는 영양분=얼리어답터나 마니아들은 그저 좋아서 시작했지만 하다보니 정보의 홍수속에서 옥석을 가려주는 역할부터 대기업 브랜드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던 알짜상품을 발굴하는 것까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특히 이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산업을 키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스스로가 제품을 소비하는 데 앞장설 뿐만 아니라 제품을 쓰도록 사람들에게 권유하기 때문에 제품의 보급속도가 빨라진다. 때로는 리콜이나 관련법 수정을 통해 제품의 질을 향상시키고 산업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도 제몫 이상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야말로 ‘소비의 미덕’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얼리어답터의 최문규 사장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무조건 안쓰고 절약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교육받기 때문에 얼리어답터들의 행위나 마니아적 성향을 단순 사치로 보는 경우가 많다”면서 “얼리어답터가 늘어나고 마니아층이 두터워져야 산업의 성장이 빨라지고 기반이 탄탄해지기 때문에 이들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문제점도 없지는 않다. 방금 산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제대로 찍어보지도 않고 업그레이드하고 싶어 안달이 나거나 DVD를 보지도 않고 소장만 하고 있는 등 제품의 본질보다 외양에 치중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하이테크 제품일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하기 마련이다.
또 사이트에 덤핑 제품의 정보가 올라와 유통업체들이 제품 판매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 개인적인 성향을 지닌 마니아들이 자신이 선호하는 제품은 무조건 좋고 나머지 제품은 나쁘다는 식의 흑백논리를 펴는 경우 등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PDA벤치의 김병윤 실장도 “제품의 ‘사용’보다 ‘소유’가 앞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제품의 용도를 충분히 검토하고 지불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구매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제안했다. DVD프라임의 박진홍 사장은 “4년 동안 DVD관련 사이트를 운영해오면서 진정한 마니아들은 단순한 소비자를 뛰어넘어 일종의 의무감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류현정기자 dreamshot@etnews.co.kr>
■기고: 초기수용자 역할과 기업 대응-이민훈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 Minhoon@samsung.com ■
초기수용자(early adaptor)란 제품수용 주기에서 도입 및 성장초기에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군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당 제품에 대한 전체 소비자 중 13% 정도를 차지한다. 이들은 특정 제품군을 파고드는 마니아와는 달리 e토이, PDA, 노트북, 모형장난감, 가전기기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물건을 구입하고, 남들보다 신제품을 먼저 써 본다는 경험에 만족하는 소비자들이다.
이러한 초기수용자들은 신제품의 초기 단계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재빨리 구매해서 사용을 해 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구매력 파워뿐 아니라 마케터들에게는 그 이상의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역사적으로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품을 수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특성의 사람들인가에 의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영향을 받아왔으며, 기업과 소비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기업은 그들이 속한 시장의 제품수용자를 반영해 제품을 만들기 마련이다. 제품수용자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기업은 첨단기술 지향적이 되거나 기술에 지체될 수도 있다. 특히 사회가 급속히 다변화되고 제품에 대한 동일 소비자의 요구 또한 상황별로 상반된 양면성을 나타냄에 따라 초기수용자의 역할은 더욱 부각된다. 제품에 대해 보이는 초기수용자의 솔직하고 즉각적인 의사표현은 기존 마케팅 전략을 강화할 것인지 혹은 수정, 보완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디지털 매체의 활용으로 확산의 속도가 급격히 빨라짐으로써 초기 수용자는 구매를 망설이고 있는 다수의 소비자들에 대해 소비를 가이드하는 리더의 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 더욱 중요하다. 새로운 제품이 초기 수용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면 인터넷, 모바일 기기를 통해 짧은 기간에 정보가 확산되고 대중적인 붐을 조성하게 되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신제품의 출시확인과 같은 정보를 공유할 뿐 아니라 게시판에 올린 사용후기는 구전을 타고 네티즌들에게 급속히 전파됨으로써 소비시장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국내의 경우는 특정 상품이 대중화되는 기간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특성을 보이고 있다. 소비자들은 개성과 차별화를 중요시하고 제품을 선택할 때도 ‘나만의 것’을 찾으려 애쓰지만 그런 욕구와 동시에 타인과 동일제품을 사용함으로써 소속감과 안정감을 얻고자 하는 경향도 뚜렷하게 가지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개인이나 커뮤니티를 정해 놓고 그들하고만 커뮤니케이션을 하고자 하는 요즘의 10대들에게 이런 소비 동조화 현상은 보다 분명하게 나타난다. 더욱이 성별, 연령에 상관없이 스마트 소비를 지향하는 상당수 소비자들은 활발해진 온라인 토론 문화를 활용하여 특정 제품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거나 맹렬히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따라서 소속 집단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초기수용자들이 어떤 제품을 구매하는가, 또한 그 제품의 사용에서 만족 또는 불만족하는가의 여부는 신제품의 존패를 결정하는 주요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업은 해당제품의 초기수용자를 사전에 예측, 발굴하고 그들의 기대에 부합할 수 있는 차별화 요인을 타 경쟁사보다 빠르게 감지해내야 한다. 또한 공식적 커뮤니케이션뿐 아니라 구전과 같은 비공식적 커뮤니케이션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우선 신제품과 비슷한 개념을 가진 기존 제품들을 연구하고 그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군의 특성을 파악함으로써 트렌드를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신제품 초기수용자의 요구에 유연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된다면 초기수용자를 만족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해당 제품에 대해 호의적 구전이 확산되도록 유도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