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국가 정보화지수는 세계 16위다.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일본(12위), 독일(14위) 등과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통신부문에서는 지난 99년 세계 1위인 미국을 앞질러 세계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
우리나라 IT산업의 규모는 지난해 150조3000억원을 넘어섰다. IT산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이미 13%대에 달할 정도다. 전체 수출물량 가운데 IT산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지난 2000년 29.7%로 늘어 수출효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은 ‘IT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인당 국민총생산은 세계 37위(2000년 기준)에 불과하지만 IT산업만큼은 세계 16강을 넘어 8강까지 넘보고 있다.
돌이켜보면 한국 IT산업의 눈부신 발전은 매우 짧은 시간에 이룬 쾌거다. 지난 97년 7월 전자신문 지상을 통해 ‘IT’라는 신조어가 처음 소개됐다. 당시 IT인력이란 정보기술을 갖춘 사람, 쉽게 말해서 컴퓨터를 잘 다루는 지식노동자를 통칭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이 신종 노동자들이 머지않아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새로운 파워그룹이란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불과 5년 만에 ‘IT’라는 단어는 한국 경제를 이끄는 대명사로 통하게 됐다. 숨가쁜 디지털혁명을 거치면서 컴퓨터로 일하는 노동자를 뜻하던 IT인력은 어느 순간 한국을 이끄는 새로운 지식계층, IT인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특히 IMF 경제위기를 짧은 시간에 넘어서는 데 IT산업은 ‘일등공신’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처럼 한국에서 IT산업이 급부상하게 된 배경에는 이른바 ‘IT전도사’로 불리는 IT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이들은 통신·인터넷·소프트웨어 등 각 분야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한국 IT혁명을 주도한 주역이다. 특히 이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전자통신기술을 개발하는가 하면 새로운 산업과 직종을 파생시킴으로써 한국 경제는 물론 정치·사회·문화 판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파워엘리트 그룹으로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IT산업의 비중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듯 이들이 움직이면 대한민국도 따라 움직인다. 어떤 파워집단도 이처럼 단시간에 사회주도세력으로 성장한 예는 없었다. IT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한국 사회를 이끄는 거대지식집단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면 한국을 움직이는 IT인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전자신문사가 창간 20주년을 맞아 IT인력 3만9000명을 표본추출해 설문조사한 결과 IT인은 주로 20대(40%)∼30대(49%)로 대체로 대학(66%)과 대학원(12%)을 나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 지식노동자계층은 90년대 후반 인터넷 혁명을 통해 한국 사회의 지형도를 바꿔놓고 말았다. 아무런 이념적 배경없이 세상을 바꿔놓은 첫번째 세대인 것이다.
또한 IT분야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은 남성(92%)이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IT인이라 하면 20∼30대로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남자를 떠올릴 수 있다. 이들의 직종은 프로그래밍 35%, 네트워크 12%, 반도체·전자부품 10% 등으로 대개 엔지니어로 활약하고 있으며, IT컨설팅(21%) 등 서비스분야에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벌이는 것으로 조사됐다. 보통 IT인 하면 PC나 전자부품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도 이들의 직종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셈이다.
임금 수준은 보통 일반직종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대학원 이상 학력자의 경우 평균연봉이 4000만∼5000만원에 달해 비교적 높다. 그러나 1억원 이상 고액연봉자의 경우 전문대 학력자가 대졸 이상보다 훨씬 많아 통상적인 학력과 임금의 상관관계가 반영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IT인을 평가할 때에는 실적이나 실력이 학력보다 앞서는 셈이다.
평소 PC나 전자부품 등과 씨름하는 이들은 주말이면 영화·공연예술·자녀와의 놀이·스포츠·산책·컴퓨터 게임을 주로 즐긴다. 특히 이 같은 취미활동에 대한 응답이 각각 10∼14%의 고른 분포도를 보여 다양한 개성만큼이나 취미활동도 제각각인 것으로 나타났다. 보통 사람들이 주말이면 TV나 영화관람 등으로 전전하는 것에 비하면 보다 적극적인 취미활동을 벌이는 것도 이들의 특징이다.
정치 성향과 관련한 답변에서는 보수 성향을 0, 진보 성향을 100점으로 했을때 평균답변이 60점으로 드러나 자신이 다소 진보적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나 요즘 젊은층의 정치 무관심을 반영하듯 ‘정치에는 관심없다’라고 답한 사람도 10%나 됐다.
또한 IT인에 대한 공동체의식과 관련해서는 53%가 동료의식을 느낀다고 말해 내부결속력이 강한 법조계·예술계·언론계에 비해서는 다소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집단으로 볼 때 IT인은 대외적으로 하나의 공통된 사고방식과 이해관계를 지닌 집단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IT산업이 워낙 다양하게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세분화된 탓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역사가 짧은 정보통신업종에서 앞만 보며 달려온 IT인들에게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적 공감대가 들어설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IT인들은 중요한 사회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특정사안에 대해 공동의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당연히 사회적 위상에 비해 IT인 계층이 지닌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한 수준이다.
현재 직장에서 얼마나 더 근무할 생각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38%가 1∼3년, 21%가 1년 미만%이라고 각각 응답해 ‘평생직장’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응답자의 절반이 40대까지만 IT기업에서 근무한 뒤 창업에 나서겠다고 말해 특유의 모험심과 개척정신을 반영했다.
오늘날 IT인의 자화상은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사실이다. IT산업이나 경기 자체가 워낙 변화무쌍한 데다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경향이 강한 20∼30대 ‘이미지 세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교적 짧은 기간에 두각을 드러낸 집단이라 아직 정체성이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설문조사에서 드러났듯 IT인은 상당한 공통분모를 소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진보적인 정치 성향이나 개척정신은 ‘IT강국’를 향한 강한 모티브로 작용할 전망이다. 이미 IT인의 등장으로 IMF 경제위기를 정면돌파한 것이 좋은 본보기다. 다만 공동체의식이나 연대의식의 결여는 IT인이 넘어야 할 벽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문화콘텐츠진흥원 서병문 원장은 “IT인은 수렁에 빠진 한국 경제를 본궤도에 올려놓은 것은 물론 한국 디지털혁명의 신화를 창조한 주인공”이라며 “특유의 개성과 개척정신을 사회 각 분야로 확대한다면 우리 사회의 진정한 파워그룹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