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50년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는 베 조각을 호박에 문질렀을 때 종이, 실, 깃털 등 가벼운 물건이 끌어당겨지는 것을 보고 전기의 원리를 발견했다.
이는 근대 전기전자통신산업 태동의 열쇠로 평가되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이후에도 독특한 아이디어와 추진력을 갖춘 선각자들이 등장해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특히 최근 반세기동안 등장한 ‘신인류’들은 컴퓨터와 인터넷의 태동에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디지털시대의 여명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새천년에도 이들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무어의 법칙은 계속된다-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
인텔의 창시자인 고든 무어(73)가 PC산업에서 이룩한 업적은 무수히 많지만 가장 큰 업적은 페어차일드반도체 재직 시절인 65년 ‘칩의 성능이 18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을 만든 것이다.
사실상 무어의 법칙을 진짜 ‘법칙’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무어의 법칙은 그저 기술과 경제의 트렌드 중 하나를 제대로 읽은 결과일 뿐이었다.
그러나 인텔은 향후 30여년간 철저하게 ‘무어의 법칙’에 발맞춰 칩의 클록속도를 향상시켜 왔으며 메모리와 하드디스크 같은 기타의 컴포넌트를 위한 새로운 전송규약을 만드는 등의 방법으로 타 기기의 성능이 CPU성능 향상을 따르도록 유인했다.
이 트렌드에 뒤처지거나 역행하는 컴퓨터 부품 사업자들은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무어의 법칙’은 PC산업계에 신기술을 도입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낸 것이다.
고든 무어는 지난해 은퇴를 선언하고 인텔을 떠났다. 최근 반도체 공정기술이 물리적인 한계에 달하면서 무어의 법칙 위기설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무어의 법칙’이 앞으로도 디지털시대 기술발전을 선도해 나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탁월한 사업가-MS 창업자 빌 게이츠
빌 게이츠(46). 그의 이름은 세계 최고의 부자라는 사실뿐 아니라 미래사회의 예견자이자 인도자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가 하는 말은 언제나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트렌드가 돼 왔다.
75년 동료인 폴 앨런과 마이크로소프트를 차린 빌 게이츠는 80년 IBM의 기밀 PC 프로젝트에 참여해 MS DOS를 공급하게 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됐다.
그러나 사실상 MS DOS는 운용체계(OS)를 설계하는 엔지니어 한명 없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MS DOS는 시애틀 근교의 아마추어 프로그래머들의 동호회에서 발견한 Q DOS를 약간 고쳐서 만든 것이었으며 오늘날의 MS를 있게 한 ‘윈도 3.1’ 역시 애플사의 매킨토시 OS를 모방해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결국 MS의 성공은 그의 엔지니어로서의 천재성보다는 직관력을 바탕으로 펼친 카리스마적 경영철학과 경쟁사들에 대해 과감히 정면돌파한 승부수 때문이었다는 평이다.
지난해 X박스라는 게임기를 선보인 빌 게이츠. 지금은 대당 150달러의 손실을 보고 있지만 ‘빌 게이츠’가 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끊이지 않는 아이디어-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누가 컴퓨터의 미래를 묻거든, 눈을 들어 스티브 잡스를 보게 하라’
21살 허름한 차고에서 컴퓨터 천재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단돈 1300달러로 애플I을 만들어냈던 스티브 잡스는 이듬해인 77년 애플II를 발표, 첫달에만 무려 2만대를 팔았으며 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GUI)를 채택한 매킨토시를 선보이면서 개인용 컴퓨터의 전성시대를 일궈낸 장본인이다.
스티브 잡스는 천재성에서 비롯된 독단적 성격으로 인해 85년 쫓겨나다시피 애플을 떠났지만 그가 없는 애플은 80년대 후반들어 시장점유율이 하락하면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되자 96년 화려하게 복귀했다.
이때부터 애플 신화는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산뜻한 디자인과 색상의 ‘아이맥(iMac)’ 시리즈를 발판으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컨셉트를 창안하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픽사를 이끌고 ‘토이스토리’ ‘벅스 라이프’를 연속 성공시켜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영화계 최고의 상품으로 만들어냈다. 또한 86년 넥스트를 설립해 ‘넥스트스탭’이라는 차세대 운용체계를 선보이기도 했다.
◆사이버공간에서 나눠요-월드와이드웹 개발 팀 버너스리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로 꼽히는 인터넷.
그러나 지난 90년 스위스 제네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팀 버너스리가 ‘월드와이드웹(WWW)’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그는 CERN에서 만나는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외우기가 힘들어 연구소에서 사용할 사내 정보망 개발을 건의했으나 묵살됐다.
이에 그는 동료 3명과 유닉스에서 이미지 등의 데이터를 쉽게 찾아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사내망에 올렸다. 이것이 오늘날의 인터넷 주소체계인 URL과 웹페이지 언어인 HTML이다.
“웹이 지식을 공유하는 양방향의 바다에 가까워지기를 꿈꾼다. 세상의 불행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사이버공간에서 그 문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라는 그의 말처럼 현재 WWW는 전 세계 사람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장이 됐다.
◆누구나 쓰는 인터넷-넷스케이프 개발 마크 앤드리슨
팀 버너스리의 WWW 개발에 이어 마크 앤드리슨의 그래픽 브라우저인 ‘모자이크’가 등장하면서 인터넷은 폭발적 성장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미 일리노이주립대 NCSA연구소에서 일하던 마크 앤드리슨은 팀 버너스리의 WWW를 접하면서 유닉스 시스템에 한정돼 있던 인터넷이 일반 PC에서, 그것도 그래픽과 함께 작동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팀 버너스리가 만든 웹브라우저의 문제점을 분석해 ‘모자이크’를 선보인 후 졸업과 동시에 NCSA를 떠나 ‘넷스케이프’를 설립하고 새로운 웹브라우저를 개발했다.
94년 10월에 최초로 인터넷상에서 다운로드해 시작한 넷스케이프는 폭발적으로 확산돼 나갔으며 1년도 안돼 사용자가 1000만명이 넘게 된다.
핵 위협을 극복하고자 만들어졌던 아르파넷에서 출발한 인터넷이 15년간 구축해온 사용자수를 넷스케이프는 단 1∼2년만에 수백수천배로 확대시킨 것이다.
◆오픈소스의 전도사-리눅스 창시자 리누스 토발즈
‘당신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하느냐가 그 사람의 존재를 규정한다’
리눅스 창시자인 리누스 토발스가 즐겨 인용하는 말이다. 어느 철학자의 경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마돈나의 노래 가사다.
91년 리눅스 개발 당시 리누스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단지 286 PC에서 동작하는 교육용 유닉스인 미닉스를 386 PC에 가동시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고 싶었을 뿐.
하지만 지금은 그를 빼놓고는 운용체계(OS)를 말할 수 없다. 시작은 미진했지만 오픈소스 개념을 도입해 전세계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리눅스는 MS 윈도에 대적할만한 위치까지 성장했다.
사람들은 리눅스라고 하면 반MS를 떠올린다. 하지만 리누스 토발즈는 “나를 포함해 오픈소스 개발자들은 MS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재미있는 프로그래밍 프로젝트를 하고 있을 뿐”이라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리눅스의 로고인 ‘배불리 먹고 포만감에 젖어 있는 펭귄’처럼 그는 컴퓨터 유저들을 리눅스로 살찌우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다.
◆작은 관심이 성공으로-야후 창업자 제리 양
인터넷 검색엔진인 야후의 창시자 제리 양. 많은 디지털 선구자들이 그랬듯 그 역시 조그만 관심이 성공을 불러왔다.
94년 미국 스탠퍼드대에 다니던 제리 양에게 인터넷은 단지 시간을 때우는 놀이거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편의를 위해 웹사이트 주소와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제리의 월드와이드웹 가이드’를 수천명의 사람들이 이용하게 되면서 제리 양은 사업화에 승부수를 걸었고 야후는 설립 2년만에 9억달러의 가치를 갖는 벤처기업으로 성장하고 지금은 거대포털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제리 양은 야후의 성공요인 중 하나를 부르기 쉬운 회사의 이름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실제로 ‘두 유 야후(Do you yahoo)?’라는 광고문구는 나이키의 ‘저스트 두 잇’이나 버거킹의 ‘해브 잇 유어 웨이’처럼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독창적인 것은 아름답다-소니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
소니의 창업자인 모리타 아키오(78·사망)는 산업의 초창기를 장식한 인물이지만 도전적인 벤처정신으로 ‘소니제국’을 건설한 신화적 경영인이다.
56년 세계시장 진출을 위해 ‘도쿄통신공업’이라는 이름을 ‘소니’로 바꾼 후 미국 시계회사인 ‘블로바’가 요청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의 트랜지스터 주문을 거절한 그는 “50년 전에는 블로바 역시 알려지지 않은 기업이었다. 소니도 50년 후에는 세계적인 브랜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예언대로 소니는 현재 전세계 톱 브랜드로 자리매김했으며 이는 그의 벤처정신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걸어다니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라는 그가 57세때 던진 이 한마디는 단일 가전브랜드 사상 최대의 히트상품인 ‘워크맨’을 탄생시켰으며 뒤에 미국 포천지는 이 판단을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경영결단’ 중 하나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가 즐겨썼다는 ‘독창적인 것은 아름답다’는 말에는 평생을 벤처기업가로 살았던 그의 일생이 함축돼 있다.
<정진영기자 jych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