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 동화의 성냥팔이 소녀가 도시 한 귀퉁이에서 눈이 내린 겨울밤 팔다 남은 성냥으로 불을 밝히며 언 몸을 녹이다 영원히 잠드는 모습은 내 유년의 삽화 속에 하나의 영상으로 남아 있다. 동화라는 형식이 감싸주고는 있을 망정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담함으로 얼어죽은 소녀의 이야기는 기실 잔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 동화속 소녀가 지금 2002년에 다시 나타났다. 소녀는 장선우 감독에 의해 현재 이곳으로 소환된 것이다.
나는 장선우 감독에 대해 ‘요령부득’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그는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의 영화세계를 가졌다. 화엄경(화엄경)과 금강경(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넘나들며,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자본과 섹스와 정치·이데올로기를 변주하고(성공시대, 너에게 나를 보낸다, 거짓말), 소시민의 우직한 사랑(우묵배미의 사랑)과 강박적인 섹스를 통해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까발리며(경마장 가는 길), 거리의 아이들에 대한 다큐적 보고서(나쁜 영화)를 내놓는다. 이같은 다양성이 성과 속의 일체, 예컨대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발현임을 발견하는 것은 꽤나 경이롭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게임상의 가상현실을 현실과 뒤섞으며 그것이 본디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현실에서 오락실의 동전교환원을 마음에 두고 있는 한 청년이 온라인게임에 접속하여 현실의 동전교환원과 꼭 닮은 게임속 캐릭터를 만나게 되고,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게임의 주관자인 시스템과 싸운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게임·가상현실과 현실을 넘나들며 우리가 보고 있는 또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당연한 인식을 흔들어 놓는다. 영화속에 삽입된 금강경 구절(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여래를 보리라)과 장자의 호접몽을 연상시키는 나비의 출현은 견고하게 구축된 우리의 고정관념과 사고체계를 여지없이 뒤흔들고야 만다.
이같은 장선우의 테마는 영화적 방식에 대한 다양한 실험과 인용,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조합으로 표현되고 있다. 게임 화면과 자막을 이용한 전개방식, 영화 ‘매트릭스’의 액션 장면과 ‘라라 크로프트’나 ‘레옹’같은 영화 캐릭터의 등장, ‘목포의 눈물’에서 ‘아베 마리아’까지 음악 장르의 조합은 영화의 볼거리와 재미를 안겨준다. 물론 엄숙주의나 사실주의의 진정성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조잡하고 정신 사나울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성과 속의 일체-가장 속된 것에서 부처를 발견하려는 것이야말로 장선우 영화의 근간이 아니던가.
<영화평론가, 수원대 교수 chohyej@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