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74)식민지 통치와 무선통신의 발달

무선전신이 발명되었을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무선전신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특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르코니는 자신이 개발한 무선전신장치를 좀 더 개량한 뒤 영국에 특허를 출원했다. 영국에서는 즉각 특허를 등록시켰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영국이 무선전신에 관심을 가진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식민지 때문이었다. 당시 전세계에 많은 식민지를 갖고있던 영국은 각각 멀리 떨어져 있는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늘 고심했다. 아무리 빠르고 큰 배가 있다해도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신속하게 알지 못하면 그 대응이 늦어졌다. 예를들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생한 폭동소식을 듣고 영국 함대가 출동하여 몇달 후에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폭동은 끝나버린 상태였다. 때문에 영국은 각 식민지에 전신시설을 설치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대륙을 잇는 해저케이블을 설치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영국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1885년부터 1887년까지 우리나라 거문도를 불법점령했을 당시에도 제일 먼저 시행한 것이 해저 케이블이었다.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해저 케이블은 영국이 거문도를 ‘해밀턴항(Port Hamilton)’으로 이름을 바꿔 영구적으로 식민지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흔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필요성으로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은 케이블과 전선을 식민지까지 포설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케이블과 전선의 가설은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때문에 케이블과 전선 없이 통신을 수행할 수 있는 무선전신은 그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발명품이었고, 특히 영국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상업화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00년에 이미 영국에서만 4억통의 전보가 오고 갔고 미국에는 이미 100만대의 전화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엄청난 양의 통신을 처리하기 위한 교환기가 개발되었고, 이에 따라 관련 기술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신이 증가한다고 해서 무제한적으로 케이블과 전선을 늘일 수는 없었다. 또한 항해중인 선박과의 교신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미 무선전신의 출현을 위한 무대는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서, 무선전신을 연구한 사람은 마르코니뿐만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포포프도 마르코니보다 먼저인 1895년, 안테나를 연결해서 전자파를 수신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당시 포포프의 관심은 천둥·번개와 같은 기상현상에 관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 장치를 번개를 관측하는 장치로 이용했다. 이때 마르코니가 영국에 특허를 신청하자 포포프는 자극을 받아 자신이 개발한 장치를 무선전신 분야에 적용, 러시아 해군의 도움으로 선박통신을 개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얻지 못해 결국 상업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아마 마르코니도 1896년 영국으로 가서 특허를 내지 않고 그대로 이탈리아에 있었더라면 포포프의 전철을 밟게 되었을 것이다. 무선전신에 대한 연구는 포포프 외에도 독일 슈트라스부르크의 교수였던 브라운도 매우 일찍부터 관심을 갖고 열중하여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이뤘다.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TV 브라운관을 만든 주인공인 브라운은 TV 브라운관 이외에 무선전신을 실용화하는 데 필요한 광석검파기도 발명했다. 또한 전파를 송출하기 위한 전원 회로와 안테나가 직접 연결되지 않고 전자기 유도로 서로 결합되게 만들어 전신 송신 출력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방법도 창안했다.

 애초에 마르코니가 발명했던 송신기는 스파크를 일으키는 송신 전력과 안테나가 직접 연결된 개회로(open circuit)를 바탕으로 했다. 반면에 브라운은 안테나와 송신 전력 회로가 전자기적으로 동조되어 작동하는 폐회로(close circuit) 방식이라는 새로운 전자기파 송신 방식을 개발했다. 이로써 좁은 범위의 주파수대를 송출할 수 있게 되면서 전신기의 송신 출력이 놀랍도록 향상되었다. 더 나아가 브라운은 이런 원리를 더욱 발전시켜서 사람들이 원하는 일정한 방향으로 전파를 송신하는 지향성 안테나도 개발했다.

 이처럼 무선전신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많은 학문적 업적을 이룬 브라운이었지만, 브라운은 마르코니처럼 재빠르게 무선전신기술에 대한 특허를 내지 않았다. 대학 교수가 돈을 벌기 위해 특허를 낸다는 것은 당시 독일 사회에서는 점잖지 못한 행동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자였던 그는 마르코니처럼 대서양 횡단 무선통신과 같은 무모한 도박도 하지 않았다. 대기권 외곽에 전파를 반사하는 전리층이 존재한다는 것이 당시에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지구의 대기권 상층부에 존재하면서 전파를 반사하는 전리층의 존재를 몰랐다. 따라서 많은 과학자들은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전파를 이용한 무선통신은 160㎞에서 320㎞가 한계라고 생각했다. 브라운도 마찬가지로, 과학자적 입장에서 이론적으로 확립되지 않은 실험을 수행할 수 없었다.

 브라운은 그가 이룩한 무선전신의 발전에 대한 업적으로 1909년 마르코니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 이후 브라운도 뒤늦게 특허에 관심을 갖고 회사를 차렸지만, 곧 특허 소송에 휘말렸다. 브라운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미국에 억류되었고,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18년 4월 사망하고 말았다.

 무선전신의 발명은 맥스웰의 전자기학, 헤르츠의 실험 등의 선행기술과 포포프·브라운과 같은 동시대의 치열한 경쟁을 바탕으로 발전되어 왔다. 다만, 그 선행기술을 활용하여 무선전신기를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데는 과학적 지식이 많았던 브라운보다는 장치의 실용적인 개발에 더 민첩했던 기술자 마르코니가 더 유리했던 것이다.

 무선전신의 확산과 발전은 우연한 기회에 언론에 의해서도 이뤄졌다.

 당시 크리펜이라는 악명 높은 살인자가 정부와 함께 캄파니아라는 증기선을 타고 벨기에의 앤트워프에서 캐나다로 몰래 항해중이었다. 이 때 살인자를 수배한다는 소식을 무선통신으로 들은 배의 선장이 의심을 품고 영국 경찰에게 무선통신을 보냈다. 무선통신을 받은 경찰은 재빨리 캐나다에 연락해 기다리고 있다가 크리펜과 정부를 체포했고, 크리펜은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세계적 토픽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무선통신사업은 급속히 확산되었다.

 1916년 미국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해군연구소 무선국에서 보낸 진폭변조방식(AM:Amplitude-Modulated signal)의 신호를 대서양 해안에서 음성으로 수신하는 데 성공했다. 모스 부호를 무선을 이용해 보내는 방식의 무선전신 방식에서 이제 음성을 직접 전달하는 무선통신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무선통신의 발달은 지구적 규모의 전파통신 및 라디오 방송의 시작을 의미했지만, 한편으로는 서구제국주의의 식민지 확신과 통치의 고착화에 기여했다. 또한 무선통신이 전쟁에 활용되면서 그 전쟁의 규모가 대형화되었다. 전신과 전화, 무선통신의 발달을 바탕으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던 것이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