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사장으로 지낸 지 한달이 채 안됐습니다. 한 주는 미국에서 스캇맥닐리를 비롯한 경영진과 미팅을 했고, 둘째주는 업무보고, 셋째주는 파트너와 주요 고객사를 만나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을 발견했고, 무척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유원식(?) 사장은 ‘익사이팅(exciting)’이란 말로 새로운 시간에 대한 소감을 피력했다.
삼성전자 공채로 입사해 한국HP에 몸담은 지 21년. 유 사장도 인정하듯 ‘잘 나가던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유를 물을 수밖에 없다. 이미 공식석상에서 “개인적 성취감과 동기부여가 필요했다”고 밝힌 바 있지만 고민이 많았을 그 시간을 돌이켜 보기로 했다.
“개인적으로는 HP가 운이 없다고 봅니다. 지난해 9월 4일 합병 발표를 했죠. 그리고 9·11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만일 테러사건이 먼저 일어났다면 HP가 합병 발표를 했을지는 미지수라고 봅니다.” 그만큼 합병을 결정할 당시와 지금의 밑그림은 많이 달라져 있다는 얘기다.
“개인적으로 HP와 같은 조직에서 PC사업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왔고, 합병도 반대했습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합병은 성사됐지만, 4개 그룹으로 조직이 쪼개지면서 PC그룹을 맡으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PC사업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던 차에 본인이 그 사업을 맡는 것은 우습지만 경쟁사가 삼성전자라는 점도 부담스러웠다는 고백이다. “저는 HP로 발령을 받았지만 삼성그룹으로 입사했습니다. 어쨌든 삼성에서 컸는데 그 조직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죠.” 조직정비가 마무리되는 6월 이후 이직하겠다는 마음을 굳힌 유 사장에게 한국썬이 손을 내밀었다.
이젠 한국썬을 택한 이유를 들어볼 차례다. “본사를 방문해서도 느낀 거지만 벤처기업 정신이 살아있는 선의 조직문화가 맘에 들었습니다. 또 함께 일할 아태지역 보스인 제이 퓨리가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소신을 갖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맘을 굳혔죠.”
이 대목에서 유 사장은 프랑스 와인을 빗댄 조직론을 얘기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캘리포니아 와인을 하찮게 여긴다. 좋지 않은 기후환경에서 만들어진 프랑스산 와인이 최적의 태양과 바람이라는 기후 조건에서 만들어진 캘리포니아 와인보다 품질이 좋은 것은 여기에 정성이라는 결정적인 요소가 가미됐기 때문이란 것. 유 사장은 “최고 품질의 와인은 기후와 토양 외에도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데 조직에서 기후는 문화고, 토양은 개개인의 자질과 협력정신 그리고 정성은 조직과 매니저의 직원에 대한 마음이라고 봅니다. 한국썬에는 최고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정성과 협력정신이 깃들여 있습니다.”
정성이 들어간 프랑스 와인을 좋아하는 유 사장의 생각은 한국썬을 이끌어 나갈 기업 운영의 원칙으로 이어진다. “한국썬이 있기 위해서 직원들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직원을 위해 한국썬이 있어야 하죠.” 일반적인 매출지향적인 CEO와는 발상이 다르다. “스캇 맥닐리 회장을 만났을 때 그가 내게 한 말은 시장에서 1위가 되라는 말보다는 한국에서 썬이 좋은 회사로 남길 바란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격려가 있었기 때문에 제가 한국썬을 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열린 경영을 통해 동기부여를 할 때 실적은 함께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 한국썬이 변해야할 부분도 있다. 우선 한국썬의 매출구조. 시스템 수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대기업, 특히 중요한 그룹계열사 고객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 게 사실이다. “삼성이나 SK 그리고 몇몇 기업들에 대한 ‘전략적 드라이브’가 필요하다”고 유 사장도 인정한다. 한국썬이 훌륭하게 해온 파트너 비즈니스를 지속시키면서도 주요 대기업을 전담하는 역할을 강화할 계획이다.
유 사장은 이번주부터 전 임직원과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20명 단위의 팀미팅을 시작한다. 현재 한국썬이 처한 치열한 경쟁상황에서 너무 ‘기초’부터 밟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그러나 10월말까지 20회 이상의 이런 만남을 계획하고 있는 유 사장은 ‘개인개발프로그램’을 강화해 교육기회를 늘릴 계획이며, 분기별로 개인별 목표(MBO:매니지먼트바이오오브젝트)를 설정해 스스로 평가하고 새롭게 계획하는 프로그램이다.
한국썬 직원들은 생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들이다. 또 ‘삼성문화’나 ‘HP식 시스템’을 도입하려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유 사장은 한국썬의 강점이면서도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경력자들의 조직 특성을 지적한다. “빨강·노랑·파랑색이 합쳐지면 검은색이 되지만 3개 빛이 모이면 흰색이 됩니다. 팀워크는 개인이 가진 색깔이 합쳐지는 게 아니라 그가 가진 ‘빛’들을 합해야 하는 거죠.” ‘색’과 ‘빛’으로 비유한 유 사장의 지적은 팀워크가 아닌 개인의 역량에 기대 운영돼온 한국썬에 뼈있는 지적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일요일 골프’는 절대 사양한다는 유 사장을 아는 사람은 그의 ‘이모작’론도 잘 안다. 60세 이전까지는 열심히 일해 성취감을 맛보고, 그 이후는 여가와 사회봉사로 살겠다는 소신은 장애인선교활동을 하는 ‘밀알선교단’과 삼성의료원이 운영하는 자폐아학교 일에 관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썬으로 오기 일주일 전 새로 만나는 직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까 고민하다 생각을 정리한 것이라며 보여준 메모에서 유 사장은 “유명한 CEO, 훌륭한 CEO로 남기보다는 열린 경영을 실천했던 CEO로 기억되길 소망하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끝맺었다.
<약력>
△58년 출생 △81년 광운대 응용전자과 졸업 △85년 연세대 산업대학원 전자계산학 석사 △ 81년 삼성전자㈜컴퓨터사업본부 HP사업부 △96년 삼성휴렛팩커드 컴퓨터시스템사업본부 이사 △97년 동사 컴퓨터 및 주변기기유통사업본부장 상무 △98년 한국HP CCO사업본부장 전무이사 △2000년 한국휴렛팩커드기업고객영업본부 부사장 △2002년 한국HP PSG 그룹장 △ 2002년∼현재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 사장
<신혜선기자 shinhs@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