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보기술(IT)산업의 미래, 우리에게 물어라.”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이 세계 IT산업의 새로운 리더로 부각했다.
동아시아는 미국과 유럽연합(EU)에 이어 세계 IT산업의 중심 지역으로 떠올랐다. 산을 뽑아 낼 정도의 힘과 기운(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은 미국과 EU를 압도한다.
여기엔 IT산업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한 한국과 오랜 잠에서 깨어난 중국의 역할이 크다. 10년간 침묵을 지킨 일본도 인접국에 자극받아 IT국가로의 변신을 시도하며, 북한도 변화에 동참하려 한다.
무엇보다 이 지역에 조성되는 협력 분위기는 미국과 EU를 잔뜩 긴장시키고 있다.
한·중·일 3국을 중심으로 동북아 자유무역지대(FTA) 창설 움직임이 일고 있는가 하면 차세대 IT기술에 대한 이 지역 국가간 협력도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새로운 IT경제 블록의 탄생이 임박했다.
동아시아 IT경제 블록의 잠재력은 막강하다. 일본은 IT분야에서 미국의 힘에 밀려났으나 기초기술에선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한국은 초고속망과 같은 IT인프라와 반도체 등 핵심분야의 양산기술에선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서 동북아의 IT리더십을 꿈꾸고 있다. 중국은 미국에 버금가는 거대 시장을 바탕으로 IT강자로 부각하고 있다. 화교를 비롯해 외국인의 자금도 이 지역에 몰려들고 있다.
보유한 기술과 시장, 자본을 놓고 보면 동북아만이 초강대국 미국과 유일하게 상대할 수 있다.
최근의 분위기를 봐선 미국과의 격차도 급격히 좁혀질 전망이다.
미국의 IT산업이 지난 2∼3년간 경기침체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동북아 IT산업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특히 한국과 중국의 IT산업은 인터넷 등 일부의 거품이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이를 두고 “동북아 지역이 드디어 미국의 기침에도 감기에 걸리는 ‘운명의 사슬’을 끊기 시작했다”며 흥분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직은 섣부른 판단이다.
사실 동북아의 IT산업은 미국 덕분에 발전했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이 ‘꼼수’에 스스로 넘어갔다.
반도체가 대표적이다. 하청기지쯤으로 여긴 일본 반도체 산업이 막강해지자 미국은 한국쪽으로 거래선을 바꿨다. 이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급성장하자 미국은 대만과 중국쪽으로 눈길을 돌렸으며 그 결과 동북아 전체가 ‘실리콘 벨트’가 됐다.
동북아 국가는 이제 반도체 등 핵심산업의 기반을 발판으로 디스플레이, 정보통신 등으로 IT 전 영역으로 손을 뻗치고 있다.
동북아가 더욱 큰 힘을 발휘하려면 국가간 결속이 중요하다. 그동안 동북아 국가간 협력은 미진했다. 한·중·일 3국이 지리적으로 인접했으면서도 상호 교역량은 연간 1700억달러에 불과하다.
세 나라의 총 교역량 1조6000억달러의 10%를 간신히 웃돌 정도다.
미국시장만 바라보며 커왔던터라 서로 머리를 맞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갈등의 역사도 협력 확대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러나 미국시장이 거꾸러지자 동북아 국가는 눈길을 역내로 돌렸다. 문화 교류도 활발해져 갈등이 가라앉고 있다. 그 중간에 한국이 있다. 한국과 일본은 월드컵 공동 개최를 계기로 부쩍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한국과 중국도 ‘한류(韓流)’를 통해 한층 가까워졌다.
경제 협력도 한층 실질을 추구하고 있다. 한·중·일 3국은 정상회담과 재무장관회담 등을 잇따라 가지면서 협력의 기초를 닦았다.
특히 IT분야의 교류가 활발하다. 3국은 e비즈니스 협력과 차세대 이동통신 및 인터넷 표준화 등을 논의하기 시작했으며 이달말 모로코 ITU전권위원회에선 처음 IT장관회담을 갖는다. 본격적인 ‘IT리더십’ 찾기에 들어갔다.
“IT관련 핵심기술을 죄다 미국이 갖고 있는데 어떻게 미국을 이길 수 있겠는가.”
국내 IT산업계 경영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러한 시각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정보통신 발전을 보면 전혀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다. 우리보다도 외국은 그 잠재력을 더 높이 평가한다.
세계는 미국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도 세계 IT산업을 주도할 수 있다는 희망을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과 CDMA 이동통신의 성공에서 읽고 있다.
미국도 깜짝 놀랐다. 미국 하원이 지난 2월 가결한 광대역보급법안이 그렇다. 이 법안은 지역전화사업자의 망 개방 의무를 완화해 초고속망 보급을 촉진시키는 것을 뼈대로 삼고 있다. 미 하원은 초고속 정보통신망에 대한 한국의 성공에 자극받아 민간 자율의 구축방침을 철회하고 정책적인 개입을 강화했다.
50년 후 미국의 뒤를 이어 강대국이 되려는 꿈을 가진 중국은 미국시장과 기술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한국과의 협력을 강화했다. 일본 역시 이러한 변화에 대응해 그토록 탈출하려했던 ‘아시아’의 품을 다시 찾고 있다. 3국 비전의 교집합이 ‘IT’며 동북아 IT의 교집합은 바로 ‘한국’이다.
이달말 모로코에서 한·중·일 IT장관회담을 갖는 이상철 정보통신부 장관은 “한·중·일 3국이 세계 표준을 주도하고 실질적인 협력을 이끌어낼 경우 국제적인 IT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누가 뭐라 해도 21세기는 동아시아의 시대다. 산업 구조의 조화로운 개편과 금융 협력이 이뤄지기만 하면 동아시아는 미국·EU 경제 블록과 함께 세계 경제를 지배할 수 있다. 특히 무주공산인 차세대 IT분야를 선점하면 오히려 다른 경제 블록을 압도할 수 있다.
물론 동아시아 국가간 헤게모니 다툼이나 상호 불신과 같이 쉽게 넘기 힘든 산만 해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제 살길만 찾다가는 동시에 국제 무대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불안감까지 겹치면서 상호 공조의 필요성은 날로 절실해지고 있다. 일단 협력을 선택한 동아시아가 앞으로 어떤 행로를 걸을 것인 지, 세계 IT산업계의 눈길은 유라시아대륙 동쪽 끝에 고정됐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