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의 순환적 성격이나 그 순환이 기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
물론 경제가 언제 위축될지 또 언제 바닥을 치고 올라갈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많은 기업들이 지출을 극도로 줄여가며 긴축 재정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업들이 경제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말해주는 한 지표가 될 것이다.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성능이 18∼24개월마다 2배로 향상된다는 ‘무어의 법칙’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인텔이 또 다른 무어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이 또 다른 법칙은 인텔의 기업 경영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법칙이다.
인텔의 공동창업자 고든 무어가 아직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무어의 또 다른 법칙에서 말하는 바는 이렇다. “기업이 지출을 줄여야 할 때에도 전략적 투자를 하기 위한 기회를 늘 인식할 수 있어야 하며 경쟁적인 시장 환경에서 끊임없이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의 견해는 반도체나 전자산업은 호황과 불황의 분명한 주기가 있다는 것이다. 무어는 경기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선 소비자들이 전자제품을 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이유란 대부분의 경우 ‘새롭고 혁신적인 제품의 등장’이 될 것이다. 이는 경기 침체기야말로 장기적인 성장을 위해 기업들이 투자를 늘여야 할 때라는 의미다.
무어의 또 다른 법칙은 컴퓨터나 통신산업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산업 분야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것이다.
어떤 기업들은 투자의 위험 부담을 지려 하지 않는다. 기업이 투자를 하기 위해선 확실히 여분의 자금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핵심 시장의 핵심 기술에 전략적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경제가 활황일 때 기업들은 투자를 늘렸고 불황일 때엔 투자를 줄여왔다. 그러나 꾸준히 투자를 해 온 기업은 경제가 풀리기 시작할 때 경쟁에서 앞서갈 수 있다. 계속적인 투자의 결과 이런 기업들은 사업 전략을 수행하기에 좀 더 나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고 시장이 요구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보다 빨리 내놓을 수 있고 결국에는 시장 점유율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와 컴퓨터 업계는 2000년과 2001년에 최악의 불황을 겪었다. 하지만 이 기간에 인텔은 130억달러를 들여 생산시설을 개선하고 공장, 생산라인, 시험 장비를 신설하는 등 아시아와 세계 각 지역에서 투자를 늘려왔다.
현재 반도체 생산 장비의 주문이 늘고 D램 가격이 안정세를 보이고 있어 최악의 상황은 지난 것으로 판단된다. 반도체산업협회(SIA)는 올해 세계 반도체 매출이 지난해 1390억달러보다 7% 증가한 15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직 먼 이야기이긴 하지만 중국 SIA는 2010년엔 중국이 세계 2위의 반도체 시장으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신흥 시장은 상대적으로 꾸준한 성장을 보여왔다. 세계정보기술서비스연합(WITSA)이 최근 출간한 ‘디지털 플래닛 2002’ 보고서에 따르면 아시아 주요 국가들의 정보통신기술(ICT) 투자는 2000년과 2001년 사이에 오히려 늘어났다고 한다. 중국이나 인도의 경우 ICT 투자가 그 전해에 비해 각각 15%, 9% 늘었는데 이는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평균 7%보다 높은 것이다.
인텔은 90년대 중후반에 투자를 아끼지 않은 결실을 지금 맛보고 있다. 지난해 인텔 수익의 25%는 신흥시장에서 거둬들인 것이다. 지난 분기에 아시아 시장의 비중은 36%로 뛰어올랐다. 이는 인텔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이런 경향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많은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은 회사 매출에서 북미 이외의 시장, 즉 아시아와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다.
기술 개발에 계속 투자하는 것은 신흥시장에 투자하는 것 못지 않게 핵심적인 전략이다. 앞으로 기업에 수익을 안겨줄 가능성이 큰 요소는 범세계적인 인터넷 기반의 확대다. 즉 무선 네트워크의 발달, 초고속인터넷 접속, PC나 PDA 등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해 주는 기기의 보급 확대다. 이러한 기기들은 시장으로 하여금 컴퓨터, 인터넷, 생산성 향상의 혜택을 향유할 수 있도록 돕고 사람들의 의사소통을 향상시켜 준다. 따라서 기술에 투자하는 것은 성장 기회를 확대하고 기업이 새로운 수익원을 찾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무선 및 광대역 인터넷 관련 기술이 꾸준히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는 가운데 PC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새로운 기술 개발의 여지도 거의 없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사실 PC산업의 죽음을 알리는 전망은 몇 년 전부터 나돌았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지금으로선 더더욱 그러하다. 현재 전세계에서 쓰이고 있는 4억5000만대의 PC 중 상당수가 인텔 펜티엄Ⅲ 750㎒ 프로세서나 그 이전 프로세서 위에서 돌아가고 있다. 이런 PC에선 윈도XP를 제대로 구동하기가 힘들고 이 운용체계(OS)가 지원하는 앞선 기능도 제대로 이용할 수 없다. 그리고 앞으로 몇 년 내에 일반화될 그리드 컴퓨팅, 원거리 협업(remote collaboration), 멀티태스킹, 실시간 영상회의 등의 첨단 기능도 이용할 수 없을 것이다.
PC산업은 주기를 탄다. 현재 사용중인 컴퓨터의 수명이 다 돼가는 두터운 기존 고객층을 공략하고 새로운 기기로 이전 기술을 대체하는 것이 PC산업 발전의 핵심 동력이 될 것이다. 이 모든 문제의 해답은 어떻게 뛰어난 제품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다시 돌아간다. 왜냐하면 결국 중요한 것은 소비자가 사고 싶어하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고 또 신흥시장이건 기존 시장이건 시장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기 침체는 기업과 기업의 투자 계획을 위축시킬 수 있다. 투자를 보류하고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아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무어의 또 다른 법칙을 사용해 시장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분석하고 신흥시장과 미래 기술에 현명하게 또 민첩하게 투자한다면 기업은 자신이 속한 산업의 선두 주자가 됨은 물론 그 산업 전체의 성장에도 기여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폴 오텔리니 그는 누구인가
지난 1월 인텔의 사장 겸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선임된 폴 오텔리니는 현 회장 겸 CEO인 크레이그 배럿(62)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텔의 실세 중 실세. 오텔리니는 사장 취임으로 배럿으로부터 회사의 총체적인 전략과 장기 전략을 수립하는 업무를 제외한 인텔의 내부운영, 신제품 및 기술개발, 사업 효율화와 생산성 제고 등 대부분의 업무를 인수받아 총괄해오면서 세계 최대의 반도체 업체인 인텔의 2인자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배럿은 오텔리니에 대해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어 인텔의 내부운영을 담당할 적임자”라며 “인텔의 사업, 업계, 기업문화 등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인텔이 추구하는 사업계획이나 프로그램 등을 성공적으로 실행할 자질을 갖췄다”고 평한 바 있다.
오텔리니는 98년 인텔의 수석 부사장 겸 아키텍처 그룹의 총괄 매니저로 승진한 이후 210억달러 규모에 달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칩세트 사업 부문을 담당해왔으며 그 이전인 92년부터 98년까지는 세일즈 마케팅 담당 수석 부사장을 역임했었다. 지난 74년 인텔에 합류한 그는 이밖에 주변기기 사업부와 폴섬(Folsom) 마이크로컴퓨터 사업부 담당 총괄 매니저 등 여러 직책을 두루 거쳤다.
오텔리니는 마이크로프로세서 그룹의 총괄 매니저이던 90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마이크로프로세서인 펜티엄 출시를 성공적으로 진두지휘해 주변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다.
72년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경제학사, 74년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인텔은 어떤 회사
지난 68년 반도체를 이용해 컴퓨터 메모리 제품을 제조한다는 아이디어로 설립된 인텔은 지난해 기준 8만4000명의 직원과 265억달러의 매출규모를 가진 세계 최대 반도체 업체.
로버트 노이스와 ‘무어의 법칙’으로 유명한 고든 무어가 창업한 인텔은 71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마이크로프로세서인 ‘4004’를 개발한 이후 본격적인 마이크로프로세서 업체로 탈바꿈했다. 이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집채 만한 크기의 컴퓨터 에니악(ENIAC)과 맞먹는 컴퓨팅 능력을 손톱 크기에 집적시킨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마이크로프로세서였다.
이후 인텔은 78년 8비트의 8086, 79년 8088 등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차례로 개발해 PC 산업이 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8088을 탑재한 IBM PC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은 인텔은 이후에도 16비트 80286·80386, 32비트 80486, 펜티엄 등 내놓는 마이크로프로세서마다 대부분 대성공을 거두었다. 현재 인텔은 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의 80% 가량을 점유, 사실상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다.
인텔은 80년대 후반 호환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대거 등장해 한때 어려움을 겪었으나 90년대 초반 이를 겨냥해 전개한 ‘인텔인사이드’라는 공격적인 브랜드 전략으로 더욱 단단한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한때 인텔에 도전했던 비아(VIA), IDT 등의 호환 프로세서 업체들은 사실상 경쟁 대열에서 탈락했으며 현재 AMD만이 유일한 경쟁사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