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회로기판(PCB)업계가 올 세계경기 회복 지연에 따른 수요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돌파구 마련에 나서고 있다. 그동안 국내 PCB산업을 견인해온 통신장비 등 IT 경기 회복이 더뎌지자 사업고도화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업계는 이에 따라 고부가다층기판(MLB)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빌드업기판을 비롯해 차세대 PCB인 플립칩(flip-chip), 스택비아(stack via) 등 첨단 공법을 이용한 고부가제품을 잇따라 개발, 어두운 불황 탈출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한국의 PCB산업이 과거 생산량 기준으로 세계 5위권 내에 진입, 그 위상을 떨쳤다면 이제는 ‘양(Quilyti)이 아닌 질(Qualyi)’로 승부하겠다는 쪽으로 사업방향을 수정, 고기술·고부가 사업 열기가 그 어느때보다 뜨거워지고 있다.
이는 국내 PCB산업계에 가격경쟁력 강화, 신기술 출현, 환경친화적인 제조설비 구축, 신소재 개발 등 문제가 기업 생명과 직결되는 현안으로 부각, 향후 성장을 담보하기 위한 대응책 마련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중국 등 후발주자는 낮은 인건비를 등에 엎고 무서운 속도로 뒤따라오고 있고, 미국·일본 등 선두주자는 첨단기술을 앞세워 그 격차를 벌려 나가고 있는 것도 PCB산업 고도화를 부채질하는 요소다. ‘쫓고 쫓기는’ 샌드위치 마크 속에서 해결책을 한시 바삐 찾아야 할 입장에 처한 것이다.
업계는 자칫하면 기술과 시장 장악력 면에서 중국 등 경쟁국들에게 현저히 뒤처져 40년 가까이 쌓아 놓은 PCB산업사 명성에 씻지 못할 커다란 오점을 남길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산업계 원로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종이 호랑이’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지고 있다.
실제 30년 가깝게 PCB산업에 종사해 온 중견업체 휴닉스(옛 새한전자)가 최근 중국의 저가 공세로 경영난에 봉착, 파산을 막기 위해 화의절차 개시 신청에 들어가면서 업계는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며 큰 충격과 우려의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뿐만 아니라 외국에선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세계적인 PCB업체 미국 비아시스템조차도 최근 유동성 부족 등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그 어떤 기업도 치열한 시장경쟁 체제에선 기업 생명의 연속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에 PCB업계는 그야말로 초긴장 상태다.
게다가 유수 업체인 일본 후지쯔는 채산성이 악화되는 PCB사업의 수익성 향상을 위해 자국내 생산라인을 베트남으로 이전, PCB 생산을 최근 자국에서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사는 자국내에선 연구개발에만 주력하는 대신 인건비가 싼 국가에서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가격경쟁력 항샹을 적극 도모, 국내 업체의 단가를 위협할 것으로 예측된다.
결국 세계 PCB시장에선 ‘고기술 확보’와 ‘저가격 생산구조’의 양날을 날카롭게 갈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무한경쟁시대로 진입했다. 우수한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생산하는 것이 최대 화두로 부각된 셈이다.
이에 따라 대덕전자·대덕GDS·삼성전기·LG전자·코리아써키트·이수페타시스 등 대형 PCB업체들은 이러한 세계 시장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저부가제품 위주에서 고다층·고밀도·초소형 제품 개발 내지는 사업다각화로 수익성을 높이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물론 원가절감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대덕전자(대표 김성기)는 기존 회로선폭 75㎛ 제품에서 고밀도 제품의 양산에 힘을 쏟기로 했다. 이에 따라 현재 50㎛ 제품을 개발완료, 양산에 적용하고 있다. 30㎛ 제품까지도 개발을 완료한 상황이어서 향후 이를 양산에 적용하기 위한 계획을 적극 추진중이다.
대덕GDS(대표 유영훈)는 양·단면 기판과 디지털 가전용인 ‘실버스루홀’ 기판에서 사업다각화를 위해 고부가·고기술의 연성 PCB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이 회사는 오는 12월 초부터 미세회로 선폭의 연성 PCB를 양산함으로써 중국 업체들이 넘보지 못하는 고부가·고기술 시장을 선점할 계획이다.
삼성전기(대표 강호문)는 일본 등 국내외 업체와의 전략적 제휴를 통한 임베디드(imbeded) PCB·그린 PCB 등 차세대 제품 기술을 확보하기로 했다. 특히 원가경쟁력 확보를 위해 저수익 제품은 과감하게 아웃소싱하고 구매선을 다양화하기로 했다.
이수페타시스(대표 김종택)도 신뢰성 높은 빌드업 생산기술을 확보해 놓은 만큼 올해 이동통신단말기용 빌드업 PCB 시장에 적극 진출한다. 또 기판 내층에 저항기(니켈)를 집어넣은 임베디드 PCB를 개발, 양산을 위한 준비작업을 벌이고 있어 경쟁업체의 관심을 끌고 있다.
심텍·엑큐리스·코스모텍 등 중견업체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심텍(대표 전세호)은 최근 빌드업 기판 시장에 뛰어들었다. 100억원을 투자해 7000평 규모의 공장 부지에 빌드업 기판 전용 생산라인을 연말까지 설립, 내년초부터 월 1만㎡의 물량을 생산할 계획이다. 특히 이 회사는 가격경쟁력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획기적인 저비용 공법의 생산방식을 도입, 빌드업 기판의 시장지배력을 강화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또 콘덴서를 내층에 내장한 첨단 기판도 개발중에 있다.
엑큐리스(대표 김경희)는 올 하반기에 MLB 중 고도기술을 요하는 빌드업 기판사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키로 했다. 이 회사는 이에 앞서 독일 지멘스의 자외선(UV) 레이저드릴을 도입한 데 이어 양·단면 기판업체 백산전자 부지를 17억5000만원에 매입, 내년 초부터 월 5000㎡ 물량의 빌드업 기판을 양산한다는 계획하에 시설투자에 들어가 사업고도화에 심혈을 쏟기 시작했다.
특히 이를 통해 초고다층(24층)기판, 빌드업 기판, 연성 기판 등 고부가제품의 생산라인으로 활용하고 향후 테플론·메탈 등 특수 PCB사업에도 뛰어들어 사업구조를 고도화할 태세다.
업계는 또 원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산 원부자재와 국산 장비를 잇따라 채택, 고가의 수입품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PCB산업의 특성상 제조능력을 설비가 좌우하고 전공정이 설비에 의존하는 대규모 장치산업인 만큼 원판·동박·화공약품·검사장비 등 전공정의 국산화율을 높이고 이를 통해 생산원가를 낮춘다는 것이다.
LG전자 DMC사업부의 한 관계자는 “장비업체, 화공약품 업체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후방 산업을 육성, 고가의 장비와 소재 분야에 대한 국산화율을 높임으로써 설비투자비 등을 절감, 원가경쟁력을 갖추는 데 박차를 가하는 게 요즘 업체의 최대 현안”이라고 말했다.
PCB 제조업체가 국산 소재와 장비를 선뜻 쓰는 데는 가격경쟁력 요소도 있지만 오티에스테크놀로지·예원테크·구본그래픽스·호진플라텍·에스씨엠·케이피엠테크 등 이들 후방 산업체들의 꾸준한 기술개발 노력으로 품질이 한층 제고된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최근 PCB업체는 물론 장비·소재 등 PCB 후방 산업까지도 대내외적인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사업재편을 통해 한층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불혹에 앞둔 PCB업계가 산업경쟁력의 근간을 서서히 갖추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PCB산업은 올해 들어 맞닥뜨린 혹독한 시장 환경 속에서 보다 단단하고 예리한 ‘칼날’을 만들기 위해 ‘담금질’ 작업에 여념이 없다”며 “이같은 열기에 힘입어 국내 전자부품산업의 경쟁력이 한층 제고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안수민기자 smah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