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강연-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
지난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잘 풀려나가다가 잠시 정체상태에 머물기도 했으나 지난 6·29 서해사건 발발로 급속히 냉각됐다. 북한은 서해사건 발생 이후 이례적으로 유감을 표시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남북간 공동노력을 제기하는 한편 경제관리 새 조치, 신의주 특별행정구 지정 등 각종 조처를 쏟아내고 있다.
2000년 12월 4차 남북장관급회담을 위해 방북한 이후 지난 16일부터 22일까지 KBS 교향악단 평양공연단의 고문으로 다시 평양을 방문했다. 6박 7일의 체류기간에 북한의 고위층뿐만 아니라 각계 각층의 인사들을 만나 남북 합동연주회에 대한 북측 반응과 북일 첫 정상회담 분위기, 지난 7월 1일 북한이 발표한 경제관리 개선 조치 내용 등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7월 1일 시행한 경제관리 조치의 기조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북측 관계자에게 묻자 “북조선이 세워진 이후 처음에는 굉장히 열심히 일했는데 점차 게을러졌다. 농부나 광부·어부도 이전보다 게을러졌다. 즉 노동성이 아주 약해졌다. 노동성이 안 올라간 이유가 모두 월급을 똑같이 주다보니 열심히 일하려는 마음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노동성을 올려야겠다고 판단했다. 어려운 경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대로 둬서는 안된다”며 경제관리 개선 조치 시행 배경을 설명했다. 예를 들어 북측은 그동안 예금에 대해 이자가 없었다. 노동대가도 아껴봐야 자기 것도 안되니 근면성이 없었다.
그래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근면성과 노동성이 확보돼야 했다. 기조를 아끼고 열심히 일하는 바탕에서 생산성이 높아지므로 이번에 경제관리조치를 마련했다. 이에 앞서 북측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를 받아 지난 4∼5년 동안 연구를 해왔다.
이번 경제관리 개선 조치의 주요 내용으로는 첫째, 인센티브 제도를 들 수 있다. 농촌·광촌·호텔 등 어느 곳에서 일하든지간에 기본 월급에다 성과를 바탕으로 성과급을 주는 체제로 바꿔놓았다. 또한 저축을 할 경우 이번 조치에 의해 2∼3% 이자를 받고 원하는 때 인출해서 쓸 수 있다.
둘째, 정신적인 노동자보다 육체적인 노동자에 우선 순위를 둬 기존 월급의 2∼3배를 인상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평양시내 백화점에 가서 점원에게 물어보니 월급이 올라 북한화폐단위로 1200원 정도라고 했다. 지하 갱도에서 일하는 사람은 월급 1만원에다 보너스까지 타면 1만5000원을 벌 수 있고, 노동 성과에 따라 2만원을 받을 수 있다.
셋째, 남한의 경우 의료비도 내야 하고 교육비가 많이 들지만, 북한은 의료와 교육을 무상으로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러나 현재 월급에서 집세·물세·전게세 등을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이로 인해 과거에는 큰 집을 가지려고 했으나 이번 조치 이후 자기 월급에 맞는 것을 찾는 분위기다.
이번 경제관리 개선 조치를 두 달 정도 적용해 본 후 반응을 물어보니 대부분이 처음에는 이 제도를 몰라 굉장히 궁금해하고 두려움이 있었는데 현재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개인이 열심히 일한 대로 급여를 준다고 하니, 정신노동자들의 경우 동료들끼리 경쟁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성과에 대한 심사는 여러 명이 자료를 놓고 한다고 들었다. 예를 들어 대학교수 중에서도 보너스를 받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한 푼의 보너스도 못받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요즘에는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교수들이 연구실에 밤 늦게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호텔·백화점 안내원들도 과거에는 가격을 물으면 마지 못해 와서 답하고 물건을 사도 고맙다는 인사를 안했는데 이번에는 손님에게 제품을 열심히 소개하고 친절해진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서점 안내원도 이전과 달리 여러 서적을 갖다놓고 친절하게 소개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아리랑축전을 치르기 위한 때문이 아니라 이번 경제관리 개선 조치에 따른 것이라고 확신한다.
특히 북측이 최근 신의주를 특별행정구로 지정하고 특구를 총괄관리하는 장관에 네덜란드 국적의 화교 자본가를 임명했다는 것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국제법 전문가들에게는 문제로 보일 수 있다. 자체 제도내에서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통일을 지향해 가면서 남측의 동의없이 50년간 다른 국민이 와서 모든 관리권한을 갖는 것은 법적으로 조금 문제가 될 수다는 것이다.
지난 98년 경남대 총장 재직시 김책공대와의 학술교류 차원에서 방북해 컴퓨터를 기증한 적이 있는데,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일 위원장이 이에 대해 고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 위원장은 컴퓨터와 IT에 대해 관심이 많다. 김정일 위원장은 중공업과 산업단지를 만들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고 유치도 어렵지만 오히려 적은 자본으로 조금만 노력하면 발전에 지름길이 되는 게 IT라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대만과 상하이 및 베이징 IT단지 현황자료를 김 위원장에게 보고했고, 김 위원장으로부터 이를 깊이 연구하고 추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 위원장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당시 가장 관심있게 본 것이 IT단지다. 그는 귀국길에 가능한 한 IT단지를 중국 국경과 가까운 곳에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 때문에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남측은 개성과 같은 곳에 공단을 조성하자고 주장한 반면, 북측은 신의주부터 내려오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2000년 2차 남북장관급회담 당시에 신의주에서 만난 김 위원장은 “이 지역에 단지를 만들고 있는데, IT가 중심이 돼야 할 것 같다. 이를 현재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김 위원장은 푸둥지역을 둘러본 뒤 신의주에 들러 전 간부들을 소집해 IT육성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지금 북한은 IT단지를 평양 근교에 조성하는 것을 구상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평양에서 가까운 곳에 들어서는 IT단지는 북측 당국이 직접 관리할 수 있는 단지가 될 것이다. 또한 지금 신의주 특구가 IT 중심의 단지로 개발된다면 과거 나진·선봉 특구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국제적인 홍콩 스타일의 관리체제로 가면서 과감히 이 지역을 공개할 것이다.
북측은 앞으로 신의주뿐만 아니라 어떤 IT단지나 개성단지가 착공되더라도 남한과 일본이 주축이 돼 과감한 투자와 협력을 해주면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관련, 김 위원장을 비롯한 고위층의 요구는 ‘선지원’과 ‘후지원’으로 나눌 수 있다. ‘선지원’은 예를 들어 지금 북한이 컴퓨터교육을 실시하려고 하는데 컴퓨터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니까 남쪽에서 생산되는 컴퓨터를 지원해 달라고 하는 요청이다. 두번째로는 신의주뿐만 아니라 평양 근교의 크고 작은 IT단지에 남쪽이 기술지원이나 공동투자를 적극적으로 해달라는 요청이다. 또한 4개 경협 합의서를 선언해 놓고 발효하지 않고 있는데 이를 빨리 해 달라는 요청도 있다. 그리고 개성공단이 되더라도 신발·봉제도 좋지만 IT단지 만드는 것도 고려해 달라고 했다. 이 정도로 김정일 국방위원장뿐만 아니라 지도층이 IT에 대한 관심이 높고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후지원’으로는 남북이 직접 오고가지 않더라도 남측에서 개발된 기술을 북에 적극적으로 제공되도록 해 달라는 요청이다. 일종의 개발 노하우를 남측에서 지원하면, 북이 이를 바탕으로 내부에서 활용하고 라오스·캄보디아·몽골·베트남 등에 팔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결국 7·1 경제관리 개선 조치와 신의주 특구 조치가 성공적으로 진행돼야 북한이 다음 단계의 새로운 조치를 내놓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다음 조치가 나올 수 있도록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정리=온기홍기자 khoh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