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75)최초의 무선통신 선박 광제호(光濟號)

마르코니에 의해 발명되어 실용화된 무선전신이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활용되었을까.

 무선전신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910년 9월,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이었던 광제호(光濟號)와 인천 월미도 무선국간의 통신이 이뤄지면서부터였다. 광제호는 조선정부가 일본 가와자키 조선소에 의뢰하여 1904년에 건조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으로, 건조 당시에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선박이었다. 광제호 이전에 군비강화책의 일환으로 군함 도입이 추진되어 양무호가 만들어졌으나 화물선을 급조한 것으로, 근대적 군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배는 아니었다.

 전장 220척, 너비 30척, 선심 21척, 화물적재량 540톤, 총 톤수 1056톤의 군함으로 건조되어 해안경비, 등대순시 및 세관감시에 이용되던 광제호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우리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이후 해군 군함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연안세관 감시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때를 잘못 만난 탓으로 빛 한번 제대로 발하지 못하고, 민중을 구제하지도 못한 채 국운의 쇠퇴와 함께 비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군함의 자격을 상실당한 채 총독부 체신국 해사관리선으로 이적된 광제호에 무선통신시설을 설치, 통화를 시작한 것은 1910년 9월 5일이었다. 광제호와 인천 월미도 무선국간으로, 그것이 우리나라에 설치된 최초 무선전신시설과 통화로 인정받고 있다.

 당시 월미도의 무선시설은 일본 해군이 1910년 9월과 1911년 2월 사이에 설치하였는데, 서해를 항해하는 일본 선박의 무선중계와 함께 기상관측·등대통신·해안경비·해난구조 등의 특수업무에 사용되었을 뿐 일반인들에 대한 무선통신은 취급하지 않았다. 단지 한반도 침략의 중요 수단이 되는 선박의 항해에 대한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일반인에게도 일부 개방한 것으로 보인다.

 광제호에 무선통신시설을 설치하기 이전부터 일본군은 무선전신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 당시에도 연합함대와 각 순양함에까지 무선전신기를 설치하여 활용하고 있었고, 그 무선전신의 활용이 러일전쟁의 승리를 안겨주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일본은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전부터 무선통신에 대한 특권을 집요하게 요구했던 것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1900년 2월 하순에 일본공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통첩을 보내왔다.

 “근년에 발명된 마르코니식 무선전신은 가장 간편한 전신시설로 특히 육상과 해상간의 통신연결에 유효한 것임은 이미 증명된 바이다. 따라서 무수한 도서를 가진 조선의 연안에 무선을 실시함은 필요한 조치이며, 그것은 개항이래 조선과의 무역증가로 말미암아 많이 출입하게 된 일본 선박의 안전에도 크게 편리할 바이다. 그러므로 일본 정부는 부산의 절영도를 비롯한 19개소에 무선통신시설을 설치하고자 하니, 귀국 정부는 그 토지사용권 등을 항해자의 편리를 도모한다는 견지에서 승인해주기 바란다.”

 이에 대해 조선정부의 농상공부 통신국에서는 새로 발명된 무선전신이 통신상에 편리한 새로운 방법임을 이미 잘 알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설치할 예정이므로 일본의 요청은 응낙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있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의 대륙침략이 활발해짐에 따라 경성·목포·제주·부산·청진·원산·나진무선국 등이 건설되었다. 1920년대 들어 일본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체제를 급속히 확립하는 과정에서 일본 상사와 회사가 한반도에 진출함에 따라 종래의 통신시설로는 통신량의 증가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설의 확충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1919년 3·1 독립운동으로 통신시설이 크게 파괴되어 통신시설의 확장이 요구되고, 1922년 3월에 체결된 산동철병조약으로 시베리아 출정군과 직접통신이 불필요하게 되자, 일본은 경성육군무선전신소를 경성우편국 용산전신분실로 개편하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일반공중무선전신사무를 취급하였다. 이때 공식 개국 이전인 1922년 12월부터 육군과 협조하여 공중무선전보를 취급하였는데, 이는 그 당시 통신사정이 매우 어려웠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선박의 안전운항과 일반 공중통신을 위한 무선시설 외에도 일제는 항공사업이 발달함에 따라 항공무선시설, 방향탐지기 및 항공무선표식을 위한 무선시설도 설치하였다. 즉, 한·일·만간의 정기항공로가 개설됨에 따라 경성과 울산을 비롯해 신의주·대구·청전·함흥·평양·강릉·울릉도·추풍령·광주 등에 항공무선국을 설치하였으며, 지역조건에 따라 방향탐지기와 무선표지도 설치하였다. 이밖에 어업용 무선시설과 선박무선시설 등도 함께 운영하였다.

 한편, 광제호의 무장해제와 함께 조선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한 일본은 조선 사람들의 해운업 진출을 의도적으로 봉쇄했다. 조선 사람들이 해운 대리점이나 화물 중개업에 손대는 것까지도 억제했다.

 선박에 근무하는 기술자들도 마찬가지로, 보통 선원으로 취업하는 데는 심한 제한을 두지 않았으나 해양기술자 자격을 취득하는 데는 많은 통제를 했다. 다만 명분상 극소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해기사(海技士)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를 위해 설립된 선원양성기관 ‘인천해원양성소(仁川海員養成所)’에 별과와 본과를 두어 보통 선원과 해기사를 양성했다. 이 과정에서 무장해제된 후 항로 표지선이 되어 인천항에 계류되어 있던 광제호는 실습선으로 활용되었다.

 이 때 조선인 해기사로 광제호에 걸렸던 마지막 태극기를 보관한 신순성(愼順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1895년 이후 관비로 일본 체신성 관할 도쿄상선학교에 입학하여 1901년 12월에 졸업한 한국인 최초의 해기사 가운데 한사람인데, 신순성은 교육에 참여했던 사람들에 비해 6개월 가량 늦게 졸업했지만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했다. 그는 귀국 후 정부가 도입하여 운항하다가 대한협동우선(大韓協同郵船)에 위탁하여 운항중인 우편선의 부함장 직위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신순성은 한일합병 당시 광제호에 부함장으로 승선하고 있었으나 2등 운전사(2등 항해사)로 직급이 격하되었고, 이후 인천해원양성소의 실기교관을 겸임하면서 항해실습교육을 담당해 광제호를 실습선으로 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또한 심순성은 무장해제된 채 군함에서 세관감시선으로 변한 광제호에서 마지막으로 내린 태극기를 남 몰래 집안에 보관하다가 광복된 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부산호에 게양하여 초창기 해운의 상징적인 인물로 남아있다.

 우리나라의 무선통신은 뒤늦게 도입되기도 했지만 도입된 이후에도 일반인들을 위한 통신이 아니라 일본의 한반도 식민통치도구로 주로 사용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국토의 분단으로 인한 남북 대치상황에서 보안성 문제로 통제를 받아 발전의 속도가 늦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 한일월드컵 개막식에서 영상전송이 가능한 IMT2000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시연해 보였듯이 무선을 활용한 이동전화 분야에서 우리가 세계 최강국 반열에 올라섰다는 것은 광제호에 무선통신시설이 설치되었던 때와 비교하면 대견스럽고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 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