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토피아>과학혁명의 구조

 *과학혁명의 구조/토마스 쿤 지음/까치 펴냄

 

 새 천년의 벽두인 2000년 1월 10일. 미국의 인터넷그룹인 AOL이 출판·영화·음악 등 전통적인 미디어업계를 대표해온 타임워너그룹과의 합병을 전격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세인을 놀라게 했다. ‘AOL타임워너’라는 초거대그룹의 탄생은 AOL그룹이 타임워너그룹의 주식을 시가의 70%에 이르는 프리미엄을 주고 인수함으로써 이뤄졌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대목은 AOL그룹이 매출액·근로자 수 등에서 타임워너그룹의 약 5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소규모였는데도 합병의 주체가 됐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이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됐을까.

 여기에는 인터넷사업의 향후 성장 가능성, 두 기업간 주식가치의 차이 등과 같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기업 경영의 패러다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은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사물에 대한 견해와 생각을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틀로서의 가치관 또는 사고방식이다. 기업경영에서는 기업 자체와 기업을 둘러싼 환경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고방식을 이른다.

 ‘패러다임’에 대한 논의를 최초로 개진한 학자는 미국의 과학철학자인 토마스 쿤이었다. 그가 쓴 ‘과학혁명의 구조’는 더이상 소개가 필요치 않을 만큼 일반인에게 잘 알려진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과학혁명의 구조’를 관통하는 기본 사유는 쿤이 ‘정상과학’이라고 부른 대부분의 과학적 활동이 기실 특정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그 무엇, 즉 패러다임에 기반을 둔 활동이며 마치 해답이 있고 해답에 이르는 길이 주어진 퍼즐 풀이와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을 공유하고 있는 정상과학의 연구자와 전문직 종사자들은 과학 연구에 있어서 동일한 원칙과 기준을 견지하며, 평소에는 이 원칙과 기준에 따라 연구를 진행한다. 오랜 기간 적용돼온 기존 패러다임이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고 있어 새롭게 시도되는 어떤 패러다임도 인정받거나 적용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이런 정상과학의 상태가 무한히 지속되고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단계에 이르러 패러다임의 기본 원칙과 배치되는 현상이 생기고 해결되지 않는 퍼즐이 속출하면 위기가 도래한다. 이 같은 위기의 시기에는 기존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현상을 설명해낼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과학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시간이 흘러 새 패러다임이 옛 패러다임을 전면적으로 대신하게 되면 과학혁명은 완료된다.

 요즘처럼 기업을 둘러싼 모든 상황이 급변하는 변동의 시대에는 과거의 경험과 지식은 더이상 구래의 가치와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부터 이익을 보는 집단과 개인은 기존의 틀을 고수하거나 이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짙다. 주요 임원회의나 토론 석상에서 자신들의 20∼30년 지난 경험담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경영자들이 이 집단에 속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일반인 역시 자신의 사유규칙이자 행동법칙인 기존 패러다임에 의해 현상을 보기 때문에 자신의 패러다임에 맞지 않으면 처음부터 배척하거나 눈을 감는다.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성공을 약속하지 않는 단절의 시대 내지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기존 선입견과 경험적 사고를 버려야 산다. 사물이나 현실을 지각하는 데 있어 지금까지 사용해온 낡은 필터를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야 한다. 먼지가 쌓인 채 책장의 한 모퉁이를 장식하고 있을 쿤의 책을 꺼내 다시 한 번 음미해보는 것도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는 좋은 방법일 듯싶다.

 <김종길 덕성여대 교수 way21@duks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