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보기술(IT)의 젖줄 역할을 해온 미국 실리콘밸리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사상 유례없는 IT업계의 불황이 혁신적 IT의 산실인 실리콘밸리를 벼랑끝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세계 최대 퍼스널컴퓨터(PC)업체인 휴렛패커드(HP)를 비롯해 인텔(세계 최대 반도체업체), 선마이크로시스템스(세계 최대 유닉스 서버업체), 오라클(세계 2위 소프트웨어업체) 등 내로라하는 IT업체들이 몰려 있는 이곳 기업들의 연구개발(R&D)비가 줄어들고 있다고 보도하며 “이에따라 실리콘밸리가 세계의 기술혁신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
실리콘밸리 IT기업의 R&D 투자감소는 개별 기업들의 성장을 주춤하게 하는 것은 물론 가뜩이나 대박이 없어 우울해하고 있는 세계 IT시장에 더 짙은 암운을 던져주고 있다. 60여년의 역사를 가진 실리콘밸리는 마이크로프로세서, PC, 인터넷 등 고비때마다 히트상품을 내놓으며 세계 IT시장을 이끌어 왔다. 이에는 R&D라는 ‘드러나지 않는 일등공신’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FT 조사에 따르면 선마이크로시스템스, 시스코, 애질런트 등이 작년보다 R&D를 줄인 대표적 기업으로 나타났다. 선과 시스코는 90년대말의 닷컴호황의 최대 수혜자이자 이어 불어닥친 2000년 이래 닷컴붕괴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기도 하다. 선과 시스코는 2000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세계 IT경기의 불황여파로 매출과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어 R&D 비용축소라는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는’ 극단적인 처방도 불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실리콘밸리 상위 IT기업의 R&D 비용감소는 지난 60년대 이후 미국 기업들의 R&D 투자가 결코 감소세를 보인 적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위기감을 높여주고 있다.
FT는 기업들의 설비투자 감소에 따른 매출감소가 R&D 투자감소라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실제 샌퍼드번스타인증권은 올해 상반기 기업들의 설비투자 삭감 때문에 상반기 IT매출도 작년동기보다 12%나 줄어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IT기업들은 매출 감소분을 상쇄하기 위해 인력감축·R&D 투자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의 비용 절감책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매출감소 외에도 R&D의 또다른 돈줄인 벤처캐피털의 투자액이 줄고 있는 점도 ‘기술혁신 실리콘밸리’의 입지를 좁게 하고 있다.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에 따르면 올 상반기 벤처캐피털의 실리콘밸리 투자액은 작년 동기보다 무려 39억5000만달러나 감소했다.
밸리 기업들의 R&D 투자비 감소와 별도로 미국을 비롯한 유럽 등의 유명 생명공학업체의 경우 인력감축으로 세계 IT불황을 타개해 나가고 있어 그만큰 신기술 개발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아이슬란드에 있는 게놈 그룹인 디코드제너틱스(DeCode Genetics)는 벤처캐피털에서 자금을 받기 위해 인력을 30%나 감원했으며 일부 바이오기업의 경우 60%까지 나 인력을 줄였다. 샌프란시스코 연방은행의 댄 윌슨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91년 걸프전 발발로 인한 경기침체때보다도 이번이 더 심각하다”며 “실리콘밸리 IT기업들의 R&D 비용축소는 IT불황의 골이 91년보다도 더 깊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경고했다.
<방은주기자 ejb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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