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불황은 통신장비, 기업용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반도체, 인터넷업체 등 거의 모든 IT영역에 미치고 있다.
이 지역 최대 소프트웨어업체인 오라클의 회장이자 최고경영자(CEO) 래리 엘리슨은 ‘엄청난(brutal) 침체’라며 밸리의 현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현재의 실리콘밸리 불황은 미국 IT산업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이전 같은 호황기를 다시 맞기 힘들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
컨설팅업체인 바인의 글로벌 기술 및 통신 대표도 “고객들이 IT제품을 구매하지 않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아직도 불황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우려했다. 세계적 투자은행 메릴린치도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역사상 그 어느때보다도 매출과 수익달성에 고전하고 있다고 언급하며 “코너에 몰린 IT기업들이 급기야 기업성장의 핵심엔진이자 생명줄인 R&D마저도 손대고 있다”며 “IT성장 발목을 잡는 이같은 행위는 자칫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널 수도 있다”며 경고성 신호음을 보냈다.
사실 실리콘밸리가 오늘날의 젖과 꿀이 흐르는 세계 최고 IT 산실이 된 데는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우수한 인프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실리콘밸리는 독특한 미국식 혁신과 기업가 정신이 충만할 뿐 아니라 법률·규정·세금·회계·법인관리·파산 등 창업에 관련된 모든 인프라가 세계 그 어느 곳보다도 뛰어나다. 여기에 신상품과 서비스, 시장, 사업모델 등에 관한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녹아들며 마치 거대한 ‘지식의 가마솥’을 형성하고 있다. 또 실리콘밸리에서는 IT에 대한 아이디어 확산속도가 빠른데 이는 수준높은 유동적 노동력이 풍부하다는 점도 한몫한다. 인재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자석 같은 실리콘밸리는 인종차별 없이 능력과 재능만 있으면 누구든지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는데 인텔의 앤드루 그로브 회장(헝가리 출신)과 야후의 제리 양(대만)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IT인프라를 자랑하는 실리콘밸리도 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예전과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실리콘밸리를 그동안 든든히 받쳐주던 막강한 축이던 벤처캐피털의 투자감소가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벤처캐피털 분야에서 30년간 일한 베테랑인 딕슨 돌은 “벤처캐피털의 투자 대비 수익이 작년에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보이더니 올해도 역시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며 우울해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벤처기업의 기업공개(IPO:Initial Public Offering)도 찬바람을 맞고 있다. 벤처캐피털이 후원하고 있는 신생 기술업체들의 올 상반기 IPO 금액은 1억4700만달러에 불과, 2000년 상반기의 64억달러와 비교하면 천양지차를 보이고 있다.
히트 기업을 찾아 눈을 부라리고 있는 벤처캐피털의 밸리 지역 투자액도 하락세를 보여 지난 2000년 상반기 193억달러에 달했지만 작년 같은 기간에는 78억달러로, 급기야 올 상반기에는 40억5000만달러로 뚝 떨어졌다. 실리콘밸리 대다수 기업들이 자금줄을 찾아 애면글면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실리콘밸리 성장의 강력한 축이었던 벤처자금 투자액이 급감하면서 그간 밸리 호황을 이끌었던 선순환 체계도 균열조짐을 보이고 있다. 실핏줄 같은 돈이 돌지 않으면서 창업지원 등 다른 축들도 흔들거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실리콘밸리의 잿빛 현실을 비웃기라도 하듯 중국·일본·유럽 등 다른지역의 IT단지들은 착실히 성장하며 밸리의 덜미를 잡아당기고 있다.
중국 베이징의 중관춘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IT단지로 자리잡았으며 일본 정부도 장기불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리콘밸리 같은 IT단지 조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또 영국·핀란드·프랑스 등 유럽 각국도 국가경쟁력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킨다는 차원에서 저마다 IT단지 육성에 정부 차원에서 두팔 걷고 나서고 있다.
<방은주기자 ejb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