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76)제1차 세계대전과 무선전화

‘작전의 귀신’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독일 군인이 있었다. 슐리펜이었다. 그는 베를린 출생으로, 독일군 참모총장으로 있으면서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 군사작전의 기본계획을 수립한 인물이다.

 슐리펜은 우세한 적에 대항해 열세의 병력으로 적을 포위, 전멸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칸나이 전투를 모델로 삼아 이른바 ‘슐리펜 계획’을 고안해냈다. 칸나이 전투는 적보다 적은 병력으로 적을 포위하여 섬멸한 군사작전의 상징으로, BC 216년 남(南)이탈리아의 칸나이에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이 5만의 병사를 이끌고 8만여 로마군을 전멸시킨 전투였다. 이때 로마군은 7만여명의 전사자를 낸 채 궤멸당했고, 카르타고군은 6000여명의 전사자만 낸 채 쾌승을 거뒀는데, 슐리펜은 러시아와 프랑스를 동시에 상대하는 전쟁에서 이 칸나이 전투를 독일이 승리할 수 있는 전투 모델로 삼았던 것이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러시아와 프랑스간에는 동맹이 맺어진 상태로, 불가피하게 전쟁이 시작되면 독일은 러시아와 프랑스 양국과 전쟁을 벌여야 하는 형편이었다. 슐리펜은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육군 전체의 8분의 7 병력을 개전과 동시에 서쪽 프랑스로 진격시켜 6주안에 프랑스군을 괴멸시킨 다음, 곧바로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는 대담한 전략을 수립했다.

 프랑스를 굴복시킬 때까지 동부전선에는 독일군 전체의 8분의 1 병력으로 러시아군의 서진을 막도록 하고, 서부전선에 배치되는 독일군에 대해서는 프랑스 방향을 향하여 북쪽에 병력을 집중시켜 우익으로 강력하게 벨기에를 공격하고 이어 북프랑스로 쳐들어가도록 한 계획이었다.

 슐리펜은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필히 우익을 강화시켜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1913년에 죽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1년만에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이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이 밀파한 자객의 흉탄에 맞아 피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발칸에서의 열세를 일거에 만회하고자 전쟁을 시작했고, 동맹국 독일도 전쟁을 부추겨 대부분의 유럽 열강과 미국이 참여하는 국제적인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역사는 이를 제1차 세계대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전쟁의 핵심에 있던 독일군의 육군참모총장 몰트케는 개전 당시 슐리펜의 작전계획과는 달리 우익 쪽에 병력을 집중시키지 않고 좌익 쪽으로 많은 병력을 배치시켰다. 그 결과 남쪽은 강화되었으나 북쪽은 그만큼 약화되었다. 더욱이 러시아군의 동프로이센 진격속도가 예상보다 빨라 개전 직후 북프랑스로 공격해 들어가기 직전 서부전선의 2개 군단을 동부전선으로 돌려야만 했다.

 결국 ‘슐리펜 계획’은 영국과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실패로 끝나고 전쟁은 지구전으로 바뀌었다. 지구전은 인구나 물량 면에서 앞선 연합군에게 유리했고, 미국의 연합군 가담은 독일군의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전선은 고착되어 참호전으로 변해버렸으며 단순돌격으로 전선을 돌파하려는 무모한 전술이 실행되어 수십만명의 군인들이 죽어갔다.

 독일은 고착화된 전쟁을 지속적으로 치를 수 없었다. 독일은 프랑스와 영국과 싸워야 하는 서부전선과 러시아와 싸워야 하는 동부전선을 동시에 지탱할 수 없었다. 양면전쟁은 힘의 분산을 의미했다. 독일로서는 절대적으로 피해야 했던, 가장 경계했고 우려했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수립한 ‘슐리펜 계획’과는 반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결국 1918년 11월 11일 독일은 항복했고, 제1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독일이 수립한 ‘슐리펜 계획’의 실패는 연합국에게는 ‘마르느의 기적’으로 불렸다. “‘슐리펜 계획’이 매우 우수했으므로 이것이 성공했다면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격파되었을 것이다”라고 전사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슐리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통신망이었다. 군대를 통제할 통신수단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슐리펜 계획의 수행을 위해 총참모본부에서 모든 작전을 통제했지만, 7개군을 움직이는 데는 통신망이 불충분했다. 오보와 지연이 이어졌고, 결국에는 명령에 대한 신속성과 정확성을 잃어버렸다. 통제에 대한 신뢰도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훈련된 독일병정들은 전방으로 진격을 계속했지만, 부대간의 간격이 벌어지면서 그만큼 통제를 위한 통신도 어려워졌다. 당시 군사통신망은 유선전화가 활용되던 시절로, 부대간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전화통화를 위한 전선의 가설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익을 담당했던 독일의 제1군과 제2군은 서로 통제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마르느강을 통과해 파리로 진격하려고 너무 빨리 방향을 틀어버렸다. 따라서 독일군 주력의 방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고, 그것을 인지하고 스스로 멈추려 했을 때는 이미 주력과의 간격이 너무 멀어져 버렸다. 이때 프랑스와 영국군이 역습을 시도했다. 목표는 마르느강 북쪽으로 진격하던 독일군 제1군과 제2군의 벌어진 틈이었다. 몰트케는 위험을 감지했지만 때는 늦었다. 의사결정은 지연되었고 판단은 어렵게 되었다. 이때 헨치 중령을 파견해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이는 도리어 치명적인 실수로 나타났다.

 통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군대는 공포였다. 헨치 중령은 제대로 통신이 수행되지 않고 틈이 벌어져 있는 군대를 보면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유능한 중령이었지만, 소심했다. 결국 헨치 중령은 그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독일군의 후퇴를 지시했다. 그의 지시에 의해 이뤄진 철수에 대해 역사가들은 “독일은 우익이 승리한 상태에서 철수를 해버렸다”고 적고 있다. 후퇴를 함으로써 적에게 재편성의 기회를 제공했고, 독일병정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당시 독일군의 한 대대장은 연대장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연대장님, 부대원들이 지휘에 대한 신뢰를 잃었음을 정중히 보고드립니다.” 이렇게 서부전선의 공격이 실패로 끝났고, ‘슐리펜 계획’도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한 채 독일은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도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만일 무선전화가 상용화된 1916년 이후에 전쟁이 벌어졌다면 상황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동중인 모든 병력의 통제가 실시간적으로 가능하다면 독일은 승리하고도 철수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때 제1차 세계대전의 진행과정은 사뭇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제1차 세계대전은 비행기가 최초로 전쟁무기로 등장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전쟁 초기에는 간단한 정찰비행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드디어는 공중전으로까지 발전되어 전세를 좌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찰비행에서 얻은 정찰정보를 즉시 지상의 아군에게 연락하고, 비행기 상호간의 통신을 위한 무선전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비행기에 최초로 무선전화를 장착한 곳은 프랑스군이었다. 한 프랑스 무선통신회사는 연합군의 발주로 1차대전중 1만8000대의 비행기용 무선전화장비를 제작했다. 또한 각국도 막대한 연구자금을 들여 무선통신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 연구결과를 제품화하기 위한 생산설비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전쟁이라는 분명한 시장이 확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