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업계 합종연횡 가속화

 세계 반도체업계가 새 판을 짜기 위한 구조조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지난 수십년의 반도체 역사에서 반도체업계의 합종연횡·인수합병 등은 불황의 끝 무렵 회복기를 앞두고 심심치 않게 터져나오는 보편적 현상이 돼버렸다. 하지만 최근처럼 반도체시장을 재편할 만한 움직임이 다수의 업체 사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한 방법과 형태로 벌어지는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현상이다. 그만큼 불황의 골이 깊다는 증거다.

 지난 4일 발표된 일본 엘피다메모리의 미쓰비시 D램사업 인수, 대만 파워칩세미컨덕터와의 전략적 제휴는 규모나 파급효과 면에서 큰 사건이다. 하지만 이는 빅뱅의 마무리가 아닌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반도체업계에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 어제 특허권 침해로 맞소송을 벌이며 사생결단을 내겠다던 업체들이 오늘에 와서는 전략적 제휴 또는 사업합병 등으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또한 이와 정반대의 현상도 일어나는 곳이 반도체업계다.

 최근 들어 삼성전자와 도시바가 향후 7년간 양사의 반도체기술을 공유하기 위한 크로스 라이선싱 계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지난 5월 도시바가 삼성전자를 상대로 미국 무역위원회(ITC)와 뉴저지법원 등에 제기한 특허침해소송은 전면 백지화됐다.

 엘피다 중심의 일본, 대만업체간 D램사업 통합이 결정되던 지난 4일 대만의 모젤바이텔릭은 독일 인피니온테크놀로지와 유지해오던 제휴 관계를 파기한다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모젤바이텔릭과 인피니온이 공동설립한 프로모스테크놀로지의 입지도 흔들리게 됐다. 지난 5월 인피니온은 모젤바이텔릭의 경쟁자인 대만의 난야테크놀로지와 제휴, 300㎜ 웨이퍼사업과 관련해 기술공조 및 합작공장을 설립하기로 한 바 있다.

 지난해에는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의 경영자가 방한, 앙숙관계던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경영진을 비공식적으로 만나 불황기의 공조방안 마련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으며 경영위기에 봉착한 하이닉스에게는 D램 인수, 비메모리 공조의 카드를 제시하기도 했다.

 ◇살아남기 위한 짝짓기=메모리업계의 짝짓기는 생존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즉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이다.

 이번 엘피다와 미쓰비시, 파워칩의 통합 및 제휴 역시 해당 회사 모두 사상 최악의 위기에 봉착한 상황에서 이뤄졌다. 현상태가 지속된다면 대상업체 모두 군소업체로 전락하거나 자연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이들은 협력 테이블에 앉았다.

 더욱이 D램 1위 업체인 삼성전자와의 시장점유율 격차가 날로 커지고 있는 데다 소신공양할 거라 믿었던 하이닉스가 그대로 버티고 있어 시장점유율 축소 위기에 내몰린 마이너 메모리업체들은 최후의 선택으로 합종연횡을 택하고 있다.

 최근 2년간의 만성적자와 불황의 시기에 가중되는 투자부담도 짝짓기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난달 중순께 일본의 NEC와 도시바가 차세대 메모리인 M램(마그네틱램)을 2005년까지 공동개발 및 양산하기로 합의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불황기에 손잡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살아남기 위한 메모리업계의 짝짓기도 가속화될 전망이다.

 인피니온과 결별한 모젤바이텔릭이 엘피다 진영에 추파를 던지고 있고 홀로 남은 윈본드가 지각변동기의 생존전략 차원에서 반려자를 찾아나설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첨단기술 확보 위한 비메모리 합종연횡=메모리업계에 비해 비메모리업계의 합종연횡은 더욱 활기를 띠는 양상이다. 목적은 90㎚ 이하의 미세회로공정에 필요한 기술력 확보와 300㎜ 웨이퍼 생산능력을 갖추기 위한 공동투자.

 모토로라·필립스·ST마이크로간 제휴가 대표적인 사례다. 응용분야 전반에 걸쳐 시장에서 맞수인 이들 업체는 최근 대만 수탁생산(파운드리)업체 TSMC를 중심으로 90㎚ 공정기술을 공동개발, 생산을 위탁하는 협약을 맺었다.

 또 인피니온·모토로라·아기어시스템스는 디지털신호처리기(DSP)의 시장을 독주하고 있는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를 견제하기 위해 DSP코어기술 개발에서 제품 생산·판매까지를 책임지는 ‘스타코어’라는 회사를 공동설립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일본 미쓰비시와 손잡고 이동전화 단말기 등 모바일기기에 들어가는 카메라 핵심 SoC를 공동개발하기로 했다. 삼성전자의 CMOS 이미지센서(CIS)기술과 미쓰비시의 이미지신호프로세서(ISP)기술을 결합하기로 한 것.

 물론 전 단계에서는 공동마케팅이 이뤄지지만 종국에는 SoC로 한 배를 탈 계획이다.

 가장 최근에는 히타치와 미쓰비시가 각 사의 시스템LSI·플래시메모리·S램 등 반도체사업부문을 하나로 합쳐 내년 4월께 르네서스테크놀로지라는 통합법인을 설립하기로 했다. 통합법인의 연간 예상매출은 9000억엔에 달해 반도체 메이커로서는 도시바를 제치고 미국 인텔에 이어 세계 2위 업체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불황장기화 국면을 타고 초대형급과 중형급의 반도체 구조조정 태풍이 세계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잇따라 발생하면서 세계 반도체업계는 사상 최대의 격변기를 맞게 될 전망이다.

 <최정훈기자 jhchoi@etnews.co.kr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