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 도쿄게임쇼 2002가 열리고 있는 도쿄 마쿠하리 메세. 고막이 찢어질 듯한 음악소리와 전시된 각종 오락기에서 터져나오는 수천가지의 기계음, 금새 옆사람을 놓쳐버릴 듯한 인파행렬에 어지간해서는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소니, 세가, 캡콤, 반다이, 코나미, 코에이, 남코 등등 이름만 들어도 명성을 느낄 수 있는 기업들 부스 앞에 서있는 수백명의 관람객으로 인해 한치의 발 디딜 틈도 없다. 신작게임을 해보는 사람, 이벤트에 열중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 등 모습과 표정은 제각각이지만 모두들 뭔가에 열광하고 있는 분위기는 그대로 감지된다.
‘Playing is in our DNA.’ 이번 도쿄게임쇼 2002 행사의 슬로건이기도 한 이 문장보다 일본 게임문화를 더 잘 표현해주는 말은 없을 듯하다.
굳이 해석하자면 게임을 즐기는 것은 이미 유전자 속에 내재된 본능과도 같다는 것. 게임을 즐기는 일본인들의 태도와 게임산업이 일본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일본 컴퓨터엔터테인먼트소프트웨어협회(CESA)가 최근 발표한 CESA 2002 백서에 따르면 일본 게임은 2001년 기준으로 출하규모 1조4574억엔을 기록, 세계 게임시장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이 수치는 2000년 1조1775억엔에 비해 30.3% 늘어난 것이다. 장기 침체국면에 빠져있는 일본 경제부문 가운데 게임산업의 성장지표는 단연 돋보인다.
일본이 20여년 동안 게임강국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강력한 내수기반을 갖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2001년 게임출하 규모 가운데 무려 33%에 해당하는 4852억엔이 일본 내수시장에서 소비됐다. 물론 이 같은 수치는 99년이나 2000년의 39%, 43%에 비해 낮아진 것이기는 하지만 지난해 해외 수출물량의 증가에 따른 상대적인 비중하락인 만큼 오히려 긍정적이다.
2000년 발매된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2(PS2)은 아예 발매 2년 반만에 전체 1억2000만 일본 인구의 8%를 넘는 1000만대나 팔렸을 정도.
통상 일본시장의 10배로 간주되는 미국시장에서 PS2의 판매대수가 1200만대인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내수시장 기반이 강력한지 알 수 있다. 닌텐도의 게임큐브와 게임보이 어드밴스도 지난 한해동안 내수시장에서만 총 600만대 가량이 판매된 것으로 나타났다.
때문에 일본은 게임 천국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일본 게임의 대표주자인 비디오 게임을 비롯해 일명 인형뽑기로 불리는 UFO캐처, PC게임, 아케이드 게임, 메달 게임 등 온갖 종류의 게임들이 즐비해 있다.
전자상가인 아키하바라의 게임타이틀 판매체인인 소프맵이나 라옥스 게임관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아직 구경할 수 없는 캡콤의 오토 모델리스타나 D3퍼블리셔의 프로젝트 미네르바 등의 신작게임이 수십종 진열돼 있다.
이들 타이틀은 일본 게이머들에게 우선 검증을 받고 올 말쯤 미국이나 유럽 등 다른 지역으로 수출된다. 일본은 새로운 게임의 성공여부를 가리는 리트머스 시험지이자 하나의 게임이 성장, 발전, 소멸하는 성장모델의 첫 관문이기도 하다.
도쿄의 아키하바라, 시부야, 하라주쿠와 같은 젊은이들이 모이는 거리에 가보면 일본인들이 얼마나 게임을 즐기는지, 게임에 열광하는지 체감할 수 있다. 거리 한 블록마다 게임센터나 게임장이 늘어서 있어 어디서나 원하는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시부야에는 클럽 세가를 비롯해 40∼50개의 게임센터가 밀집해 있을 정도. 일본 경찰청과 관련업계에 따르면 일본내 게임센터의 수는 3만개 안팎으로 추산된다. 요즘은 e삼성에서 투자한 네카PC방 체인도 아키하바라, 시부야 등 전국 주요지역 14개로 지점을 확대하고 있다.
어떤 나라·지역에서든 게임에 열광하는 마니아층이 있기 마련이지만 일본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는 것은 좀 특별난 데가 있다. 최근 게임열풍이 불고 있는 중국이나 오락실·PC방을 통한 온라인 게임에 익숙한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은 20년 동안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다소 폐쇄적인 형태로 게임을 즐겨온 것이 크게 차별화되는 점이다.
지금 일본 게임의 주요 소비층을 형성하고 있는 20대 전후의 세대들이 대부분 기호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3. 4살 때부터 게임기를 접한 셈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게임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문화가 어릴 때부터 형성됐으며 이들의 까다로운 취향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려는 일본 기업의 기질이 맞물려 막강한 게임시장 파워를 갖게 됐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열렬한 게임 애호가이면서 한국 온라인 게임을 일본에서 퍼블리싱하고 있는 감마니아 재팬의 데츠야 오가와 과장은 “여행·레저 문화가 다양하지 못한 일본에서 게임이 발달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설명한다. 교통비와 숙박비가 너무 비싸 보통사람들은 여행을 간다든지, 레저를 즐기는 문화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 일본 총무성이 발표한 가계조사 결과에서도 2000년 일본 가구당 여가를 위한 교양오락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3만2000엔으로 일본 물가에 비해 쓸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일본에서의 게임 즐기기는 우리나라처럼 여러명이 떠들썩하게 함께 어울리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국민성과 문화에 대한 접근성의 차이 때문인지 게임은 커뮤니케이션 도구나 함께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집에 틀어박혀 혼자 파고들어야 하는 개인오락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반다이의 동물 기르기 게임인 다마고치가 97년까지 1500만개가 팔려나간 것도 이 같은 개인적인 취향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일본에서도 게임은 더 이상 혼자하는 것이 아닌 온라인 상에서 함께 즐기는 커뮤니케이션 툴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형성되고 있으며 그동안 주수요층을 차지했던 어린이 위주의 콘텐츠 개발에서 여성층, 노인층, 30대 직장인층을 겨냥한 다각적인 게임장르 개발이 이뤄지면서 또 한번의 변화를 맞고 있다.
<도쿄(일본)=조인혜기자 ihcho@etnews.co.kr>
◆일본 게임 일번지 아키하바라·시부야
아키하바라와 시부야는 일본 게임마니아의 집결지이자 일본 게임유행을 이끌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아키하바라는 게임숍이 즐비해 있고 시부야는 게임센터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 게임 소프트 판매체인인 소프맵이나 라옥스 게임관 등에는 온갖 종류의 게임 타이틀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1, 2층은 TV게임, 3층은 DVD, 4, 5층은 PC게임. 6층은 성인용 게임으로 구성돼 있는 소프맵 아키하바라점에는 층마다 100여명의 게이머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판매순위 집계나 게임 대진표 같은 것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시부야에 있는 네카PC방의 경우도 항상 30∼50명의 게이머들로 북적거린다. e삼성 투자사인 인터피아에서 운영하는 네카PC방은 14개점 가운데 시부야와 아카하바라점이 손익분기점을 맞추고 있을 정도로 이들 두 지역이 일본 게임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시부야 도겐자카에 위치한 게임센터인 클럽 세가에서 만난 게임마니아 기타자키(남 22세)는 게임을 즐기는 보통 일본 젊은이 가운데 하나다. “새로운 게임을 즐기기 위해 이틀에 한번씩은 시부야나 아키하바라에 나온다”는 그는 지금도 집과 게임장을 오가며 하루 2∼3시간씩 길티기어xx와 같은 액션게임을 즐긴다. 타이틀 구매와 게임장 오락을 위해 쓰는 비용만도 한달에 2만엔(20만원) 이상.
이렇다할 벌이가 없는 나이에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기타자키는 그러나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자신은 마니아라는 이름을 붙일 수준이 못된다고 설명한다. 하루 10시간 이상 게임에 매달리며 한달에 10만엔 가량을 게임비용에 쏟아붓는 친구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 두 지역에서 느낀 일본 게임시장의 특징은 신작 타이틀의 라이프사이클이 상당히 짧아지고 있다는 것. 9월 첫주에 5만장이나 팔린 닌텐도의 슈퍼마리오 선샤인은 1주일만에 캡콤의 PS2용 타이틀인 오토 모델리스타의 7만장에 1위를 내주면서 3위로 내려앉았다. 미국에서는 올 말에나 발매될 예정인 슈퍼마리오 선샤인이 이미 일본에서는 1차 검증을 끝내고 있는 것이다. 또 캡콤의 요시키 오카모토 전무의 말처럼 조작은 단순하면서도 점점 화려한 그래픽과 잔혹한 내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일본 게임의 추세로 자리잡고 있다.
이에 반해 발매된 지 17년이나 된 슈퍼마리오 브라더스나 20년된 건담의 인기 역시 여전하다. 하나의 게임에 빠져들면 좀처럼 다른 게임으로 옮겨가지 않는 속성도 혼재하고 있는 셈. 유행에 민감하면서 동시에 옛것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일본 게이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지금도 세계 게임업체들은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고 있다.
<조인혜기자 ihch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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