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말 초호황을 맛본 세계 IT업체들은 2000년과 2001년의 암흑기를 거치면서 엄동설한에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이에 따라 이들 업체는 한해를 시작할 때 “올해는 설마 작년 같은 불황이 오지 않겠지…”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힘차게 첫발을 내디뎠다. 실제 가트너·IDC 등 유명한 시장조사기관과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연초만 해도 “하반기부터는 세계 IT경기가 나아질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잇따라 내놓았다. 하지만 연초부터 시작된 세계 경기침체가 한해의 끝이 다가오는 지금까지도 복지부동에서 벗어날 줄 모름에 따라 연초의 장밋빛 전망은 결국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확실해졌다.
지난 8월 일본의 나스닥재팬 파산에 이어 최근에는 독일의 노이어마켓(신시장)도 거품(버블)붕괴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첨단주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미국 나스닥도 1200선이 무너지면서 하루가 멀다하게 ‘최저치 경신’이라는 좋지 않은 기록을 양산하고 있으며 일본 닛케이 평균주도 9일 심리적 지지선으로 여겨져온 8500엔이 무너졌다.
이에 따라 세계적 IT기업을 이끌고 있는 수장들의 경기 우려 목소리도 높아만 가고 있다. 세계 2위 소프트웨어업체인 오라클의 최고경영자 래리 엘리슨은 “현재의 IT불황은 사상 유례없는 침체”라며 “이를 단순히 경기순환적 침체로 보는 것은 너무 안일한 생각이다”고 밝혔다.
일본 소니의 하워드 스트링어 미국법인 회장은 “가장 큰 문제는 PC사업에서 나타나고 있다”며 “소비자들이 더이상 가정용 PC를 교체하려 하지 않고 있어 사실상 PC시장이 붕괴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푸념했으며, 대만 D램 생산업체인 파워칩세미컨덕터의 프랭크 황 회장도 “모든 사람들이 연말을 맞아 그 어느때보다도 오히려 지출을 더 줄이고 있는데 이는 예년에 없던 매우 이례적 현상”이라고 걱정했다.
유례없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세계 IT기업들은 일차적으로 직원줄이기로 불황파고를 헤쳐나가고 있다. 기업들이 전가 보도로 사용하고 있는 감원바람은 컴퓨터, 통신, 반도체,인터넷 등 전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특히 세계 IT시장에서 가장 큰 파이를 차지하고 있는 통신분야에서 그 양상이 더 심하다. 감원뿐 아니다. 출장과 고객행사 축소는 물론 회의에 나오던 커피나 음료까지도 없애는 등 이들 기업의 불황타개책은 그야말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걸쳐 있다.
최대 불황에 신음하고 있는 세계 IT업체들이 그나마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오는 4분기 특수다. 이미 9월에 시작된 새학기 특수에서 쓴 맛을 한번 본 이들은 연중 최대 특수기인 4분기 경기를 노리고 할인행사와 신제품 출시 등 다양한 마케팅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우선 세계 최대 개인용컴퓨터 업체인 휴렛패커드(HP)를 비롯해 컴퓨터업체들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새로운 운용체계(OS)를 장착한 차세대 노트북 컴퓨터인 ‘태블릿PC’들을 11월 7일에 잇따라 내놓는다.
이전의 컴퓨터와 개념을 달리 마우스가 아닌 손으로 직접 써서 저장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태블릿PC는 신기능 부재로 정체상태에 빠진 PC수요를 부추길 것이라고 컴퓨터업체들은 기대하고 있다. 태블릿PC뿐 아니라 오디오·비디오 기능을 획기적으로 높인 ‘윈도XP 미디어센터 에디션’ PC도 12월께 쏟아져나올 것으로 보여 PC판매를 부추기는 또다른 한 축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점차 고성능화돼가는 휴대폰도 비디오 기능이 강화된 신제품이 시장에 속속 나오면서 소비자의 구매욕을 자극할 전망이다. 노키아 등 세계적 휴대폰업체들은 비디오 기능이 개선된 새로운 휴대폰을 미국에서 최근 선보이는 등 격전에 돌입한 상태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주머니를 두툼하게 해주었던 주식시장이 나락으로 떨어지자 올 4분기 세계 IT경기는 이마저도 예년 같은 활황세를 보이지 못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가트너의 한 애널리스트는 “DVD플레이어 등 디지털가전과 휴대폰은 상대적으로 PC와 서버 등 컴퓨터분야보다 시장상황이 나은 형편”이라며 “4분기 세계 IT시장이 전년 동기보다 8∼10%의 성장을 보이는 가운데 이를 노리는 업체간 경쟁이 그 어느때보다 치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방은주기자 ejb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