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IT기업들이 한국지사를 철수 또는 축소하려는 움직임의 배경에는 한국 IT시장의 침체라는 상황이 깔려있다. 닷컴열풍 때문에 한때 아시아의 최대시장으로까지 부상한 한국 IT시장에 찬바람이 불자 경쟁적으로 밀려들어왔던 외국계 IT기업들이 본사 차원에서 한국 비즈니스를 재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이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외국계 기업들은 대부분 특정분야 전문업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뉘앙스는 음성인식, 잉크토미는 웹캐싱서버, 레드햇코리아는 배포판 리눅스, ATG코리아는 CRM 분야의 전문업체다.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독특한 솔루션으로 시장점유율을 높여온 기업들로 닷컴열풍으로 한국의 IT시장이 커지자 틈새시장을 노리고 한국에 진출, 그동안 상당한 매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이 경기위축에 대응하기 위해 불요불급한 부문을 제외하고는 IT투자를 큰폭으로 줄이자 그동안 틈새수요를 노렸던 이들 기업으로서는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이들 업체의 한국지사 철수가 곧바로 한국시장에서의 비즈니스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지사철수에 나서는 외국계 IT기업들은 국내 총판을 지정하거나 제휴업체를 선정하는 등 간접영업을 하는 형태로 한국시장에서의 비즈니스를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는 계획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잉크토미는 한국지사를 철수하면서 펜타시스템테크놀로지에 국내 독점 판매권을 넘겼다.
이처럼 외국 전문업체들의 비즈니스 형태가 간접영업으로 바뀜에 따라 외국 솔루션을 국내 환경에 맞게 커스터마이징을 하고 판매하는 디스트리뷰터의 역활과 입지가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 소프트뱅크, 인성디지탈, 다우데이타시스템 등을 포함한 국내 소프트웨어 벤더들의 경우 외국 업체들의 간점진출로 상당한 반사이익을 기대하고 있다.
틈새시장을 겨냥해 한국시장에 진출했던 외국계 IT업체들이 이처럼 지사를 축소하거나 철수하는 것과 달리 IT분야의 메이저 업체들은 공격적인 경영으로 어려움을 정면 돌파한다는 전략을 취하고 있어 외국계 IT업체들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실제로 한국HP, 한국IBM, 썬마이크로시스템즈, 마이크로소프트, 한국오라클, SAP코리아 등 메이저 컴퓨팅 업체들은 그동안 전문업체들의 영역이었던 중소중견업체 시장(Small & Medium Business)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하는 등 국내 IT시장의 ‘싹쓸이’ 전략을 가동하고 있다.
특히 네트워크 분야의 경우 한국이 기회의 땅으로 부각되고 있어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다.
시스코시스템즈와 루슨트테크놀로지스·알카텔 등 네트워크업체들의 경우 세계 주요 통신사업자들이 실적악화로 고전하고 있는 것과 달리 KT와 SK텔레콤 등 국내 간판급 통신사업자들이 안정적인 사업을 전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최첨단 통신장비의 테스트베드로 부상함에 따라 국내 시장공략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오히려 리버스톤네트웍스·플라리온테크놀로지·텔리엄·포렐 등 세계 통신벤처들은 앞다퉈 한국에 지사를 설립하거나 기존 한국지사의 위상을 강화하고 이를 거점으로 세계시장의 주도권 경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결국 한국의 닷컴열풍에 편승, 엘도라도를 찾아 무작정 한국에 뛰어들었던 외국계 IT기업들의 한국이탈현상은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전략만이 한국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귀한 교훈을 던져준 셈이다.
<이창희기자 changh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