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 계열사의 게임사업 법인인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SCE)는 지난 3월말 끝난 2002 회계연도에서 1조엔 매출을 달성했다. 플레이스테이션2 수출 호조에 힘입어 전년 매출 6610억엔에 비해 무려 50%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특히 이 시기 SCE의 순익은 무려 830억엔으로 2001년의 510억엔 적자를 완전히 털어냈을 뿐만 아니라 소니전자, 소니뮤직, 소니픽처스 등 계열사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수치를 나타냈다. SCE 대외홍보담당 후쿠나가 부사장은 “2001년에는 소니전자가 최대 흑자를, SCE가 적자를 기록했으나 2002년에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면서 게임부문이 소니의 효자종목으로 부상했다”며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삼국지로 유명한 게임SW 개발사 코에이는 지난 3월말 기준으로 240억엔 매출에 55억엔의 순익을 기록했다. 일본 경기침체로 한자리수 순익도 내지 못하는 다른 업종의 기업들에 비하면 코에이의 23% 순익비중은 놀라울 정도. 그러나 코에이의 이 같은 성적지표는 동종게임SW 개발업체와 비교하면 평균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일본 게임SW 하우스들이 20∼30%에 이르는 높은 순익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례는 일본 게임산업의 위상과 부가가치를 잘 보여준다. 게임산업은 일본의 장기 침체국면으로 대부분 마이너스 성장 혹은 현상유지에 급급한 다른 업종에 비해 단연 돋보이는 지표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 컴퓨터엔터테인먼트산업협회(CESA)가 발표한 2002 CESA 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게임시장은 1조4,500억엔 규모를 형성, 2000년 1조3000억엔에 비해 11%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게임산업은 침체에 빠져있는 일본 전체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게임산업은 단지 일본 시장에서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은 단순 오락거리였던 게임을 산업적인 모델로 갖춰낸 초기 주역이자 전세계 게임시장에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공급, 600억달러 시장으로 키워낸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일본 게임이 없었다면, 닌텐도와 세가와 같은 일본 게임업체가 없었다면 20년 역사에 불과한 세계 게임산업이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영화시장보다 더 커지지는 못했을 거라는 관측이 가능하다.
일본은 엄밀히 말하면 게임 종주국은 아니다. 1958년 미국 브룩헤이븐 국립연구소에서 최초의 테니스 게임이 나온 이후, 20여년 동안은 미국 주도하에 게임에 관한 각종 연구와 실험적인 개발이 계속됐다. 특히 미국 아타리사의 경우는 최초의 콘솔게임기인 아타리 VCS를 개발하는 등 게임시장의 초기 주자로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게임시장을 키운 것은 일본 기업과 제품이다. 일본이 게임산업에 눈을 뜬 것은 78년 데이토사가 아케이드 게임인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내놓으면서부터. 80년 닌텐도의 게임&워치, 81년 남코의 PACMAN 등이 연이어 출시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83년 닌텐도가 내놓은 가정용 게임기 패미콤은 세계 게임산업의 획을 긋는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닌텐도는 게임SW 품질을 높이기 위해 SW라이선스 모델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으며 85년 출시한 슈퍼마리오 브라더스는 전세계적으로 4000만장이 판매되는 경이적인 기록을 수립하면서 대박 게임의 실체와 게임산업의 장밋빛 미래를 보여준 것이다.
SCE 후쿠나가 부사장은 “닌텐도, 세가, 소니로 이어지는 일본 게임 메이저의 역할이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게임시장의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더욱이 게임이 일부 마니아를 위한 틈새산업에서 90년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대중산업으로 변화한 데는 일본 게임업체들의 양산능력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게임 미디어였던 롬카세트는 증산에 2∼3개월 가량이 소요되기 때문에 정작 주문 후 생산이 된 시점에는 인기가 식어버리고 재고부담만 남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이때 소니는 미디어를 CD롬으로 전환해 증산에 따른 생산주기를 최소화하면서 게임산업은 많은 물량을 적시에 공급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물론 일본게임이 강한 것은 최고의 품질 때문이다. 일본에서 8년째 살고 있는 한게임저팬의 천양신 사장은 “일본 게임산업은 일본인 특유의 성향이 잘 살려진 분야”라며 “일본의 장인정신, 오타쿠(마니아) 문화는 게임분야에서도 완벽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나타났고 이것이 전세계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트리트파이터Ⅱ를 개발한 전설적인 게임 개발자이자 일본 게임계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캡콤의 요시키 오카모토 전무는 “일본 게임의 세계화는 우수한 품질을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라며 “납기일 준수와 품질 제고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게임업체들이 기울이는 노력은 최고 수준”이라고 전했다.
여기에다 최고 수준의 게임 개발자를 양성하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 단기 매출 모델과 중장기적인 투자전략이 어우러져 일본 게임을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일본 게임업체들은 사내에 사업 프로듀서, 게임 프로듀서, 인터랙티브CG, 게임 프로그래머, 캐릭터 디자인, 그래픽 디자인, 사운드 작가 등 게임 각 분야에 특화된 전문가를 두고 고도로 지능화된 분업과 협업을 병행하고 있다.
전국에 퍼져있는 수십개의 게임아카데미도 일본 게임의 체질을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여기에다 하나를 만들어도 제대로된 상품을 만들어 오랜 기간, 다양한 방식으로 우려먹는 원소스 멀티유즈는 본받을 만하다.
일본 3대 게임SW 하우스인 캡콤의 경우 750여명의 개발자를 두고 50여개의 게임 개발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본사인 오사카 600명을 비롯해 도쿄, 미국, 한국 등에 개발자를 두고 있으며 철저한 내부의 도제식 교육과 체계적인 외부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특히 교육을 받은 인력이 다시 재교육을 할 수 있는 인력이 되도록 철저한 교육이 이뤄진다. 오카모토 전무는 현재 진행되는 프로젝트 대부분이 최종 상품으로 출시돼 캡콤의 미래 매출을 책임지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반다이 역시 매년 신규사업 분야에만 50억엔을 투자할 정도로 공격적인 게임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반다이의 주요 매출은 아직도 20년된 건담 시리즈에서 나온다. 게임, 비디오, 영화, 캐릭터 인형에 이르기까지 건담 파워는 여전히 막강하며 조만간 건담 네트워크라는 네트워크 게임으로 또 한번의 멀티유즈를 꾀하고 있다. 11번째 시리즈까지 나온 파이널판타지의 경우는 스퀘어사에 1000억엔 이상의 이익을 남겨준 효자상품이다.
일본 게임의 또 하나의 강점은 글로벌 시장에서 먹혀들고 있다는 점. 지난해 일본 게임 출하규모 가운데 무려 3분의 2 가량인 9700억엔이 해외 시장에서 소화됐을 정도로 일본 게임의 해외파워는 막강하다. 성장률도 내수시장이 0.6%에 그친 것에 비해 해외시장에서는 무려 53%를 나타냈다. 이 같은 수치에는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2가 큰 몫을 했다.
현재 4000만대가 출하된 PS2는 일본 내수물량을 제외한 2800만대가 북미, 유럽 등 해외시장에서 판매됐으며 이 수치가 꾸준히 늘고 있어 일본 게임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전망된다.
코에이의 고마쓰 기요시 COO겸 사장은 “강력한 내수 기반을 바탕으로 해외에서 성공을 거두는 일본 게임의 글로벌화 전략이 점점 강화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도쿄(일본)=조인혜기자 ihcho@etnews.co.kr>
<박스> 일본의 게임인력 교육
한국게임산업개발원에서 게임아카데미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모 관계자는 도쿄게임쇼 2002 기간중 몇몇 일본 게임아카데미와 접촉하면서 일본 게임 관계자들의 높은 콧대를 실감했다. 일본의 좋은 커리큘럼과 교재를 참조해 국내 게임아카데미 수준을 한단계 높인다는 생각이었으나 상대방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고. 일본에서 게임사업을 벌이고 있는 모 국내 게임업체 사장도 일본 게임개발자를 만나면 “한국에서 게임이 뭔지 알기는 하냐”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게 다반사라고 한다.
이는 일본 게임의 자존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다. 일본은 게임에 관한한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이 같은 자존심의 저변에는 최고 수준의 게임 개발자와 이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게임아카데미의 활성화가 뒷받침돼 있다.
일본에는 현재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아카데미(DEA)와 일본 전자전문학원, 디지털 할리우드 등 수십개의 게임 아카데미가 성업을 이루고 있다. 일본 게임아카데미의 특징은 철저히 산업계의 요구에 따른 인력양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DEA가 유명 게임메이커 20여개가 출자해 만든 게임아카데미인 것이나 코나미가 직접 운영하는 KCE가 유명세를 떨치는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 기인한다.
각 학원들은 전문 게임제작업체로부터 게임 제작에 관련된 노하우를 제공받는다. 교육과정에서 이를 활용하고 또 게임업체에 파견해 연수를 진행하기 때문에 교육을 끝낸 수강생들은 바로 현업으로의 투입이 가능하다.
일본 게임 교육기관의 또 다른 특징은 단순히 게임에 관한 기술 교육뿐만 아니라 콘텐츠 중심의 미디어 믹스 문화를 가르친다는 점. 가령 비디오 게임기용 프로그램은 워드프로세서와 같은 단순한 SW가 아닌 내용에 의한 평가가치가 더욱 중요한 만큼 이를 철저히 활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화, 애니메이션, 아케이드 게임, 비디오 게임 등 각 콘텐츠 분야에서의 연계 및 노하우 공유가 상시적으로 이뤄진다.
<조인혜기자 ihch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