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78)화가 모스(중)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지 4년만에 재정 형편이 어려워진 모스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부호들이 많이 거주하는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살고 있던 삼촌의 소개로 유명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였다. 초상화 하나에 15달러밖에 받지 못할 때 모스는 60달러에서 300달러씩 받고 그림을 그렸다.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의 초상화를 그린 것도 그때였다. 750달러 짜리였다. 아내 루크리샤와 결혼한 것도 그때였다.

 모스는 민주주의가 실행되는 장면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하원’이라는 제목의 커다란 그 그림은 개정중인 미국 하원을 나타낸 것으로 많은 사람에게 갈채를 받기도 했다. 당시 작품을 인정받는 것과는 다르게 수입은 매우 불규칙했지만, 모스는 많은 시간을 신앙을 위해 바쳤다. 그의 고향 교회에서는 미국에서 거의 처음으로 주일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모스는 그 당시 처음으로 과학적 발명에 관여했다. 동생과 함께 개선된 물펌프를 발명했으며, 대리석 절단기를 발명하기도 했다. 모스의 예술적 재능과 과학적 재능이 결합을 시도한 것으로, 그것은 전신기 발명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며 절차이기도 했다.

 그는 유학중에 익힌 사진기술을 통해 미국에서 사진을 촬영하기도 하여 미국 최초로 사진을 촬영한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때도 모스의 과학적 감각이 활용되었다. 당시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피사체가 10분 동안 정지상태에 있어야 했는데, 그것은 초상화를 찍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모스는 과학 교수인 존 드레이퍼와 함께 연구하여 단 1분간의 노출시간만 확보되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화학과정을 개발하기도 했다.

 모스는 1824년 뉴욕 브로드웨이에 스튜디오를 열었으나 수입이 변변치 않았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뉴욕시에서 그에게 라파예트 장군의 영웅적 초상화를 그리도록 위촉했고, 그덕에 모스는 백악관을 방문하는 영광도 가졌다. 라파예트 장군의 초상화는 지금도 뉴욕시청의 회의실에 걸려있는데, 그 그림은 모스 생애에 가장 슬픈 비극을 상기시켜주는 그림이 되었다. 아내의 죽음과 연계되었기 때문이다.

 1825년 2월, 모스는 코네티컷주의 뉴헤이븐에 있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라파예트와의 우정과, 그리던 초상화의 진척상황을 기쁜 마음으로 썼다. 하지만 그 편지를 받을 그의 아내는 바로 이틀 전에 두번째 사내아이를 출산하다가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이 비극적인 소식이 그에게 전달된 것은 장례식이 끝나고도 7일이 지난 후였다.

 워싱턴에서 500㎞ 떨어진 곳에 있어 아내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모스에게 그 사건은 전신기 개발에 대한 의욕을 결정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만일 전기를 이용하여 통신을 수행할 수 있는 장치가 개발된다면 한순간에 어디든 소식을 전달할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자신과 같은 안타까운 상황이 또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모스는 그때부터 전기를 이용한 통신방식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 실현을 위해 컬럼비아대학에서 전기강의를 수강하기도 했다.

 1926년 미술과 디자인 아카데미의 초대 회장이 된 모스는 3년 뒤 미술교육을 계속하기 위해 유럽으로 다시 건너갔다. 유럽에서도 그는 전기를 이용한 신호장치와 전기실험 그리고 유럽의 과학발전에 커다란 관심을 쏟았고, 전기를 이용한 통신장치에 대한 생각을 계속했다.

 1832년 12월. 모스는 유럽에서 대서양을 횡단하여 미국으로 가는 눌리호라는 배를 타게 되었다. 눌리호는 사람과 우편물을 함께 태우고 다니는 여객선으로, 그 배에서 모스는 찰스 잭슨이라는 미국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희귀했던 전기실험을 프랑스에서 구경한 잭슨은 전기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선물로 받아온 전자석을 배 안의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전류가 통하면 쇠붙이가 자석으로 변하게 되는 전자석은 영국의 월리엄 스타전이라는 사람이 1825년 발명한 것으로, 당시에는 매우 신기한 물건이었다.

 여객들 틈에서 전자석과 전기실험에 관한 잭슨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던 모스의 등줄기로 한순간 전율이 일었다. 전기를 이용한 통신장치 개발에 대한 계시였다. 전자석을 이용한 통신장치의 개념이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화가 모스는 곧바로 늘 갖고 다니는 작은 스케치북에다 그림을 그렸다. 머릿속에는 이미 설계도가 마련되고 있었다.

 “선장님, 이제 얼마 후에는 세계가 깜짝 놀랄 전신기의 개발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발명품이 바로 이 눌리호 안에서 이뤄졌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모스는 그렇게 선장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순수한 과학자가 아닌, 예술적 감각을 가진 과학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1832년 11월, 뉴욕에 도착했지만 유럽에서 지내는 동안 돈을 다 써버린 모스는 다시 빈털털이가 되었다. 그의 세남매는 친척집에 맡겨져 있었다. 모스는 돈 때문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 ‘루브르박물관’이란 대작을 그려서 1200달러에 팔았는데 이 그림은 시러큐스대학이 소장하고 있다가 1982년 일리노이의 한 박물관에 325만달러에 매각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도 모스가 미국 4대 화가의 한사람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1832년 뉴욕대학 미술과 조각교수로 취임한 모스는 학교에서 먹고 자고 가르치고 그리면서 전신기 개발에 열중했다. 급료는 한푼도 없이 학생들이 내는 지도비와 그림을 팔아서 생활했다. 예술촌으로 자리잡은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의 유래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초기 전신장치인 사진틀 모양의 전신기도 뉴욕대 시절에 고안해낸 것이었다.

 모스가 생각한 것은 단선회로의 전자기를 통한 통신장치였다. 모스는 그 전신기의 개념을 실험을 통해 현실화시켜 나갔다. 대학 과학교수인 레너드 게일로부터 도움을 받아가면서 실제 사용 가능한 전신기를 만드는 데 전념했다.

 하지만 제품이 완성되어 가면서 더 심각한 걱정거리가 생겼다. 먹고 사는 문제와는 별도로 실험장치를 만들고 선로를 가설하는 데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모스는 돈 많은 사람들과 미국 정부에 그 일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자금지원을 요청했지만 어느 누구도 모스의 일에 재정적으로 후원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많은 사업가들에게 전신기 작동시범을 보이면서 전신기 개발과 선로 건설에 재정적 투자를 해줄 것을 기대했지만 투자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1년을 지내며 더 나은 모델을 만들어 미국 정부에 시범을 보였다. 역시 재정지원은 없었다. 모스는 영국과 유럽에서 재정지원을 얻기 위해 1년을 보냈지만 여전히 실패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대중의 관심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모스는 뉴욕 항을 가로질러서 절연된 선로를 깔아 놓고 대중 앞에서 시범을 보이겠다는 것을 신문에 알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깔아놓은 전신선이 배의 닻에 걸려 끊어지면서 시범은 실패했고, 지원대신 조롱만 받고 말았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