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은 민주사회를 위협하는 무질서와 불법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 ‘범죄와의 전쟁’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범죄 척결을 위해 관련 법안을 강화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여 큰 호응을 얻었지만 일각에서는 이로 인해 국가의 대국민 통제가 심해져 민주화를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 또한 높았다.
사이버범죄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90년대 ‘범죄와의 전쟁’과 유사점이 많다. 과거 정부가 단지 폭력, 살인 같은 강력범죄를 소탕한다는 명목 아래 사회 전체를 통제하려해 비난받았다면 지금의 사이버범죄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사이버상의 불법행위를 근절하려는데 초점을 맞추다보니 건전한 사이버 활동마저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와 적지않은 반발을 사고 있다.
한마디로 두 ‘전쟁’ 모두 집안에 돌아다니는 ‘이 한마리를 잡기 위해 집 전체를 태우는’ 그릇된 결과를 가져올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이 한마리가 나타나도록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집주인인 정부로서는 뾰족한 수를 찾기 힘든 상황이다.
◇급증하는 사이버범죄=인터넷상에서 혹은 인터넷을 이용해 행해지는 각종 범죄행위를 일컫는 사이버범죄는 지난 수년간 놀라운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사이버범죄 발생 건수는 지난 97년 121건에서 지난해에는 3만3289건으로 275배나 늘어났다.
게다가 연령별로 봤을 때 지난해 발생한 사이버범죄의 절반에 가까운 44%는 윤리의식 정립이 미흡한 10대 청소년들이 저지른 것으로 나타나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또한 범죄 유형도 음란물 유통 및 명예훼손행위에서 해킹, 인터넷 사기, 개인정보침해 등 그 유형이 점차 다양해지고 지능화되는 양상을 띠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특히 최근에는 해킹, 악성 바이러스 유포 같은 사이버테러형 범죄 증가율이 집중적으로 증가해 사회 전체에 미칠 위협이 더욱 커진 상황이다.
◇사이버범죄와의 전쟁=사이버범죄 발생건수가 급증하자 정부 차원에서 이를 근절하려는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 정부의 사이버범죄 방지 및 근절을 위한 가장 대표적인 조직은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http://www.police.go.kr/ctrc)다.
지난 95년 경찰청 산하에 설립된 ‘해커수사대’를 모체로 하고 있는 대응센터는 97년 개편된 ‘컴퓨터범죄 수사대’ 시절에는 배치인력이 10여명에 불과했으나 지난 2000년 ‘사이버테러 대응센터’로 거듭났을 때는 총 4개팀에 69명의 인력이 배치될 정도로 나날이 조직 규모가 커지고 있다.
대응센터는 조직 규모뿐 아니라 전문성이 강화되고 활동영역도 넓어지는 등 대응 활동 차원에서도 여러모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IT 관련 자격증과 전문지식을 보유한 전문인력 영입이 늘어나고 있으며 인터폴을 비롯한 각국 수사기관과의 국제 공조체계도 강화되고 있다. 또한 신종 사이버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산하 기법개발팀을 통해 대응기법 개발작업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전 예방 vs 사후 대응=이처럼 정부 차원에서 사이버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조직 활동이 강화되고 있지만 사후 대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보니 사이버범죄를 근절하는데는 부족한 점이 많다는 지적이 없지 않다. 사이버범죄를 저지른 범인을 찾아내 일벌백계하는 것도 사이버범죄를 줄일 수 있는 중요한 활동이지만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우선 사이버세계에 대한 무리한 통제 시도에 대해 반대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정부가 온라인상의 불법 음란물 유통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을 통해 인터넷 콘텐츠에 대한 사실상 검열제도를 도입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기 위해 50여개 시민단체가 모여 인터넷국가검열반대를위한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와함께 범죄자를 처벌하고 이를 적발하는 것보다는 범죄 발생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교육활동을 강화하는 노력도 요구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초중고교의 교육과정에 올바른 IT윤리의식을 배양시킬 수 있는 내용을 추가시켜야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또한 철저하게 기술능력 배양에 초점이 맞춰져있는 각종 IT관련 자격증 교육과정에도 IT문화 교육이 일정 부분 도입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관련 전문가들은 “사회 전체 차원에서 사이버범죄를 예방하려는 노력과 범죄 발생후 대응능력을 균형적으로 갖춰야 사이버범죄를 줄이고 올바른 IT문화를 유지해나갈 수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규제가 능사가 아니듯이 막연한 예방 노력도 해결책이 아닌 만큼 사전 예방과 사후 대응 두가지 차원에서 사이버범죄 근절 노력이 병행돼야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목소리다.
◇`노(NO)라고 말하세요.’
사이버범죄 발생 건수가 급증하면서 정부 당국의 이에 대한 규제 및 처벌이 강화되는 가운데 네티즌 스스로 온라인상의 불법·부정 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시민단체 ‘인터넷자율규제포럼(약칭 R3NET)’과 ‘안전한온라인을위한네티즌운동’이 지난 8월부터 공동으로 전개하고 있는 ‘세이노(SAY NO)’ 캠페인은 건전한 IT문화를 병들게 하는 온라인상의 불법·부정 행위를 추방하기 위한 취지에서 마련된 자정운동이다.
세이노 캠페인은 그동안 온라인상의 불법행위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해왔던 네티즌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사이버범죄 근절활동에 나서도록 유도한다. 즉 온라인상에서 사기행각, 해킹, 사이버폭력, 명예훼손 등의 범죄행위를 접했을 경우 단순히 이를 피할 것이 아니라 관련 기관에 신고함으로써 피해 확산을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세이노 캠페인 홈페이지(http://www.sayno.ne.kr)에는 해킹·바이러스, 사이버폭력, 유해사이트, 개인정보유출 등 유형별로 대처방법과 신고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이버성 폭력 및 성희롱을 당했을 경우에는 우선 상대방에게 분명한 경고의사를 밝히고,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이버폭력 행위가 계속될 경우에는 화면 갈무리 등의 방법을 통해 가해자의 불법행위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해 사이버성폭력신고센터(http://gender.or.kr)에 신고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앞으로 세이노 캠페인측은 홈페이지의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보강해나가면서 오프라인상의 사이버범죄 근절 운동도 펼쳐나갈 계획이다. 우선 서울·경기 지역의 중고등학교에 세이노 캠페인 포스터를 부착하여 사이버범죄 노출 빈도가 높은 청소년들의 관심을 유도해나갈 예정이며 오프라인 교육 활동도 강화할 방침이다.
세이노 캠페인의 임시 대표를 맡고 있는 윤현 R3NET 정책 실장은 “세이노 캠페인은 네티즌들이 적극적으로 사이버범죄행위 추방 및 근절 노력에 나서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며 “국가의 일방적인 통제가 아닌 온라인 이용자의 합의와 참여를 통해 이뤄지는 민간자율규제시스템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인터뷰-하옥현 사이버대응테러단장
“사이버 범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규제와 자율에 대한 균형적인 감각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사이버테러대응센터(CTRC)는 사이버 범죄 수사 및 단속뿐 아니라 사전 예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일 계획입니다.”
지난 2000년부터 CTRC를 이끌어 오고 있는 하옥현 단장(48)은 사이버 범죄는 발생후 대응도 필요하지만 사전에 이를 예방하려는 노력도 중요하다며 두가지 차원에서 사이버 범죄 근절 노력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하 단장은 “최근 사이버 범죄 발생 건수가 급증하고 수법도 다양화·지능화하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며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IT전문 인력을 특채로 모집하고 수사원들에 대한 재교육을 강화하는 등 대응 역량을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CTRC의 활동 영역과 조직 규모가 한정돼 있는 상황에서 사이버 범죄에 대응하는 데 어려운 점이 없지는 않다는 게 하 단장의 설명이다.
“급증하는 사이버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단속 및 규제를 강화해야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매번 인터넷상의 자율을 주장하는 측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따라서 하 단장은 IT 이용자와 정부가 서로의 입장에서 한걸음씩만 물러날 것을 권한다.
“자율적인 예방이 중요하다고 해서 방치하다 보면 사이버 범죄 증가세는 꺾이지 않을 것이고 그 반대로 무조건 통제한다고 해서 사이버 범죄가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정부와 IT 이용자가 올바른 IT문화 수립 차원에서 조금씩 양보해야 사이버 범죄는 감소할 것입니다.”
하 단장은 청소년 사이버 범죄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인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기 때문에 사후 재발을 막을 수 있는 교육 부분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대부분의 청소년 사이버 범죄가 악의적인 의도없이 단순한 호기심 차원에서 벌어지는 만큼 피해자와의 합의하에 강한 처벌보다는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청소년 사이버 범죄를 줄이기 위해서는 사회 각층의 관심과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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