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79)화가 모스(하)

 모스가 전신기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지을 수 있게 된 것은 역시 돈 덕분이었다. 1837년 모스는 개발단계에서 돈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사람의 동지를 만났다. 당시 29세의 앨프리드 베일이었다.

베일은 스티븐 베일 판사의 아들이자 대포와 기관차를 만드는 스피트웰철강소의 소유자 조지 베일의 조카였다. 베일과 모스의 청을 받아들여 베일의 아버지는 모스에게 재정지원을 하게 되었고 특허출원에 소요되는 비용도 부담했다. 또한 베일 삼촌의 철강소에서 전신기를 본격적으로 개발할 수 있게 했다.

특허출원 과정에서도 모스는 동지를 만났다. 워싱턴 특허국장이 바로 모스의 예일대 동창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허국장 엘즈워스와 의논한 모스는 드디어 전신기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다.

 베일 아버지의 재정지원을 바탕으로 베일은 전신기를 만들고, 뉴욕대학에서 같이 근무하는 게일 교수는 운용시험을 계속했으며, 모스는 뉴욕에서 전신부호로 알파벳과 숫자사전을 만들었다. 역할 분담이 된 연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838년 모스와 베일은 그들의 발명을 프랭클린연구소에서 시연하여 인증을 받아냈다. 다음은 하원 상무위원회에서였다. 이때 위원장은 메인주 출신의 탐욕스런 변호사 프랜시스 스미스였다. 스미스는 모스의 발명이 대단한 것임을 알아차리고 보고서를 호의적으로 꾸미도록 만들었다. 이때 스미스는 30세에 지나지 않았으나 3선 의원이었다. 마침내 스미스는 동업자로 사업에 깊숙이 참여하여 지분의 4분의 1을 확보하게 되었다. 개인의 이해를 숨기고 스미스가 하원에 제출한 법안은 3만달러의 비용을 들여서 50마일의 전신선을 건설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순진한 모스는 사업에 있어서만큼은 어린아이였다. 그는 스미스와의 동업을 평생 후회했다.

 1843년 3월, 미국의 재무장관 존 C 스펜서는 모스로 하여금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에 실험적인 전신선을 가설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 사업을 위해 모스는 연봉 2000달러를 받는 정부의 전신국장 정도의 직책으로 취직되었다. 1843년 10월, 선로 가설공사는 볼티모어에서 시작되었다. 쟁기의 날로 2인치 너비에 20인치 깊이로 호를 파고 그 속에 전신 파이프를 묻는 방식이었지만, 공사는 순조롭지 못했다. 전신선이 작동하지 않아 공사를 중단하기도 했고, 그 사실이 신문에 나지 않도록 보안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때 전신선 가설의 총 예산은 4만달러였는데 공사가 반도 진척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산은 7000달러밖에 남지 않았고, 계약자는 40마일에 대한 공사비 4만달러를 더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모스는 상대로부터 고소하겠다는 위협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1844년 1월 8일자 일기에 모스는 그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실험을 계속해야 할지 의구심이 생긴다. 정부의 고용직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하는지 당혹스럽다. 공사 감독에는 비능률적인 면이 많고, 결정은 우유부단하고 돈 문제는 왜곡되었다….”

 모스는 특히 공사 계약의 실제 인물이었던 하원의원 스미스 때문에 많이 시달렸다. 물론 스미스는 전신기 개발과 사업화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인물이지만 모스와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 모스는 자신의 동생 시드니에게 보낸 편지에 ‘친구라고 하나 만났더니…, 이건 물불 못가리는데다 미친개와 같다’고 썼을 정도였다.

 공화당 전당대회 소식을 애너폴리스에서 직접 전달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던 워싱턴과 볼티모어간의 전신선은 우여곡절 끝에 완료되어 1844년 5월 24일 공식 개통행사가 거행되었다. 그 행사에서 첫번째로 공식 메시지를 전할 사람으로 모스의 오랜 친구의 딸이 선택되었다. 그 어린 숙녀는 모스에게 발명에 대한 영감을 주고 연구하는 동안 늘 그를 지탱하게 해준 것은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에 성경 내용을 인용했다. 성경 구약전서 민수기 23장 23절 ‘하느님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셨는가’라는 내용이었다.

 전신신사업이 상업화된 것은 국회의사당 1층 대심원실에서 있었던 공식 개통행사가 끝난 지 1년 정도가 지난 후로, 1845년 4월 1일 워싱턴에서 첫 전신국이 문을 열었다. 요금은 4글자에 1센트. 사무실을 구하는 사람이 첫 손님이었다.

 이어 전신은 그 특성상 폭발적인 증가로 이어졌다. 그 촉매는 금융거래에 대한 활용성 때문이었다. 볼티모어에 사는 한 사람이 워싱턴은행에 자기 수표를 환금해 갔는지의 여부를 알아보는 전신을 보낸 것이 그 효시였다. 1845년 6월에는 전신환 송금이 이뤄져 전신을 이용해서 돈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전신이 획기적으로 활용된 것은 신문기사의 송고였다. 신문사의 경우 첫 100자 다음부터는 요금을 반으로 깎아주기도 했지만, 신문사의 의존도는 매우 커서 신문사 직원들이 전신국에서 상주할 정도였다.

 뉴스 전달과 금융·상거래 수단으로의 활용성이 확인되자 미 대륙 곳곳으로 전신선이 가설되기 시작했다. 필라델피아와 해리스버그간에 두번째 전신망이 건설되었고, 잇따라 뉴욕과 보스턴간의 전신선이 만들어졌다.

 전신사업이 성공하면서 모스는 화가로서 뿐만이 아니라 발명가로서의 명성과 함께 재정적 보상도 얻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신기 발명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은 법정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미연방 대심원에까지 이르렀다. 그때 법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1837년에는 모스만이, 대중이 실질적으로 사용하기에 바람직한 가장 완전한 결과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모스의 발명 이전의 전신기는 결코 완전하지도 않았고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정도도 아니었다.”

 모스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았던 도움에 관해 판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스가 최선의 자료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찾고 얻었으며 그것을 활용했다는 사실은 발명가로서의 그의 권리를 손상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의 공적을 떨어뜨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모스가 전신기의 연구를 끝내고 특허를 출원한 다음해인 1838년까지 전신기를 발명한 것으로 권리를 주장하던 사람이 62명이나 되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전신기, 또는 다른 형태의 장치를 통해 인류가 좀 더 빠르고 정확하게 소식을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일반이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결과를 만들어낸 인물은 오로지 모스뿐’이라고 말한 것은 판사였다. 역사 또한 승자의 시각에서 거론되듯이 승리자 모스도 역시 역사의 승리자였다. 그 승리자의 주변에는 막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판사와 재력가, 특허국장까지 있었다. 불편한 관계이기는 했지만 하원 상무위원장도 있었다.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모스와 전신사업을 위해 도움을 주었을 것이고, 그렇게 볼 때 전신기를 최초로 만든 사람이 모스일 뿐이라는 생각은 절대적일 수 없다. 때문에 세계 최초의 실용적인 전신기 발명을 위해 모스뿐만이 아니라 60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모스만큼, 모스보다 더 치열하게 공간을 소멸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는 사실에 우리는 한번쯤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