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사피엔스 이야기>(40)투표하는 로봇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날이 다가올수록 대권후보들의 발걸음은 실체가 막연한 표심을 좇아 정신없이 분주해진다.

 오늘은 한 대권후보가 유명한 전자업체를 방문해 IT산업 육성과 과학기술 인력의 처우 개선을 약속하는 선거유세를 진행중이다. 후보측은 첨단 생산라인을 둘러보며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연신 강조하지만 사람들은 인문계 출신 정치인이 풀어놓는 과학기술 정책공약을 별로 귀담아 듣지 않는 눈치다. 언제나 그랬듯이 선거를 끝낸 정치인이 과학기술계를 다시 방문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

 현장 기술자와 일일이 악수를 나누던 대권후보에게 놀라운 상황이 발생한다. 어디선가 인간형 로봇이 성큼성큼 두발로 걸어나와 후보 곁으로 다가선 것이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기자들은 입을 딱 벌리고 대권후보는 먼저 로봇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한다. 순간 플래시가 물결처럼 터진다. 대통령 후보와 로봇이 함께 포즈를 취한 사진은 국내 신문방송은 물론 외국 언론에도 단연 화젯거리로 떠오른다. 첨단 과학을 이해하는 진보적 정치인의 이미지를 퍼뜨리는 데 이보다 효과적인 퍼포먼스는 없으리라.

 웬 엉뚱한 공상이냐고 탓하지 마시라. 여기서 소개된 사람 크기의 이족보행 로봇은 국내기술진에 의해 연말께 실제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기술적 관점에서 인간형 로봇이 각종 정치행사에서 바람잡이로 활용되는 상황도 충분히 실현가능해진 것이다.

 대중의 인식 속에서 로봇이란 그 실체와 상관없이 미래과학기술을 떠올리게 하는 가장 그럴 듯한 상징물(아이콘)이다. 코흘리개 아이부터 70세 노인까지 ‘로봇’이 뭔가 신기한 첨단과학에 속한다는 점은 거의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즉 사람 흉내를 내는 인간형 로봇은 기능성과는 별개로 엄청난 홍보효과, 브랜드가치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휴머노이드 기술이 앞선 일본에서는 인간형 로봇으로 당장 돈을 벌기보다는 이미지광고의 수단으로 널리 활용되는 추세다. 혼다의 경우 두발로 걷는 로봇 ‘아시모’의 첨단 이미지를 자동차 광고에 교묘히 응용해 수천억원 이상의 기업홍보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일제 로봇이 사람처럼 일자리도 얻고 뉴욕증시 개장행사에 참석했다는 식의 화제성 뉴스를 흘리는 것만으로 일본 과학기술계는 입지를 강화하고 자기네 국가적 위상까지 덩달아 올리는 셈이다.

 머지않아 등장할 국산 휴머노이드 로봇은 단순히 신기한 볼거리가 아니라 한국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국가·기업의 브랜드가치를 높이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또 약간의 정치적 상상력만 동원하면 로봇이 지닌 대중적 이미지를 선거활동에 이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문제는 우리 과학기술계가 로봇기술의 정치적·사회적 함의에 대해 잘 모르며 결국 이용만 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