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소프트사는 외국기업이지만 문화사업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기업입니다. 지난 봄에 있었던 박물관 음악회에도 MS가 후원을 하기도 했어요. 이번에 MS가 세중을 X박스 국내 공급사로 결정한 데는 세중이 그동안 MS의 제품을 잘 팔아주면서 디스트리뷰터 가운데 최고의 판매실적을 기록한 점과 함께 이처럼 비슷한 문화마인드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요.”
최근 미국 MS사의 게임기인 X박스 국내 공급권을 따내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세중그룹의 천신일 회장(59)은 요즘 새롭게 이전한 사무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X박스 사업을 위해 지난달 설립한 세중게임박스가 주초에 새로 입주한 강남 포스코빌딩내 사무실은 기존 IT관련 계열사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한 거점이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만난 천 회장의 첫마디는 바로 ‘문화’였다. 세간에 돌고 있는 ‘MS가 왜 게임과는 전혀 무관한 기업인 세중에 X박스 공급권을 주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1978년쯤 됐을 겁니다. 평소에 백자와 목기 등의 문화재에 관심이 많아 인사동엘 자주 갔었습니다. 우연히 한 골동상 주인과 일본인이 옛 석조물을 놓고 흥정을 하는 광경을 봤어요. 순간 우리 문화재가 일본을 빠져나간다는 생각에 속에서 불이 나는 것처럼 화가 치밀어올라 그곳에 있던 석조물 27점을 모두 사버렸죠. 그 일을 계기로 지금까지 돌을 모으고 있습니다.”
천 회장은 지난 2000년 일본으로 밀반출됐던 국보급 석조문화재 70점을 자비로 환수해 오면서 우리 문화재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으로 세간에 알려졌었다. 특히 2000년 7월 20여년간 모아온 우리의 전통 석물 6000여점으로 경기도 용인에 5500평 규모의 세중옛돌박물관을 개관한 데 이어 지난 6월에는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에 24점의 석물을 기증하면서 그동안 우리의 문화재를 수호하는데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기도 했다.
천 회장은 내년 9월이면 환갑을 맞는 고령이다. 하지만 그의 사회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82년부터 레슬링협회 이사를 맡아오다 96년에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뒤를 이어 레슬링협회 회장직을 수행해 오고 있다. 어린이국제여름마을(CISV) 한국협회 회장, 고려대학교 교우회 부회장, 사단법인 민속박물관회 부회장 등 그의 명함에 빼곡히 적혀 있는 많은 직함들 가운데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직함이다. 한때는 씨름협회와 수영연맹 회장직을 동시에 맡기도 했다.
특히 지난 2000년에는 산업자원부 산하의 사단법인으로 한국게임연맹을 창설, 총재직을 맡고 있다. 올해 활동이 미미하기는 했지만 천 회장이 게임기 사업에 관심을 갖게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천 회장 자신도 이번 X박스 사업이 가능하게 된 데는 한국게임연맹이 보이지 않는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천 회장의 사회활동이 왕성하다 보니 일반인들 가운데는 그가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재계에 발을 들여놓은 원로사업가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여기에는 그의 평소 생활이 격에 맞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한 듯하다.
실제로 아직 이전한 지 며칠 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새로 이전한 사무실에 장만한 그의 집무실은 5평이 채 될까 말까한 작은 공간에 소파도 없이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들여 놓은 것이 전부였다. 그가 건넨 명함도 재계 원로의 명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할 정도로 빳빳한 종이에 그의 화려한 직함을 나열해 놓았을 뿐이었다. 시원하게 벗겨진 이마며 서글서글한 눈매가 말해주듯이 마치 복덕방에 앉아있는 푸근한 옆집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다.
주변에서도 그를 가리켜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마음만 먹었으면 벌써 대단한 갑부가 됐을텐데 그러기보다는 그동안 벌어들인 재산을 전통 석조물을 수집하고 박물관을 건립,운영하거나 그가 맡고 있는 단체의 활동을 위해 흔쾌히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인으로서의 천 회장은 삼성그룹을 창설한 이병철 회장과 포철신화를 이룩한 박태준 씨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면서 다양한 닉네임이 붙여질 정도로 재계에서 알아주는 인물이다. 따지고 보면 천 회장이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게된 배경도 평소 친분을 다져온 재계인사들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천 회장은 “80년대 초 평소 친하게 지내온 이건희 씨와 이명박 씨,허왕구 씨 등이 각각 레슬링협회와 씨름협회, 수영연맹 등을 맡으면서 도와달라고 요청해 이들 협회에 발을 들이게 됐다”고 설명한다.
65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천 회장은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친후 68년부터 73년까지 국회의원 비서관을 지냈다. 그러던 그가 재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73년 동양철관공업의 상무이사로 근무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정치보다는 사업이 적성에 맞는다는 판단이 선 그는 이듬해인 74년 32세의 나이에 동양제철화학의 모태가 된 제철화학을 설립했다.
천 회장은 당시를 “한국의 기술, 민족의 자본, 우리의 공장’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4년간 운영하는 동안에 제철화학 공장을 국산화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은 자금상의 한계로 김우중 씨에게 매각했다”며 “그래도 한때는 포항제철과 생산량 증설경쟁을 벌일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던 회사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이를 시작으로 지난 80년대 초까지 태화유운, 동해산업, 한국과산화공업(현 영우화학) 등을 직접 설립하거나 인수해 운영해오다 82년 이들 기업을 모두 정리하고 (주)세중을 창업, 현재 세중여행, 세중컨설팅, 세중정보기술, 세중엔지니어링, 세중게임박스 등 총 5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세중그룹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천 회장은 앞으로는 또다시 새로운 기업을 설립하지 않을 계획이다. 이번에 시작한 게임기 관련 사업에 좀 더 많은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천 회장은 X박스 사업에 MS가 책정해 놓은 국내 마케팅 비용과는 별도로 현재 200억원의 자금을 투입할 준비를 해놓고 있다. 우선 내년에는 X박스 유통채널 육성을 위해 대리점 지원 및 고객체험관 구축, 전시회 등에 50억원을 투자해 최소한 20만대 이상을 판매한다는 목표를 세워놓았다.
또 국내 개발사들도 X박스용 게임 개발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중간에서 매개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MS측의 요구사항과는 별도로 국내 수요와 요구에 맞는 마케팅 정책을 개발해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이와 관련, 천 회장은 “이번에 설립한 세중게임박스는 MS의 한국지사가 아니라 국내 유통을 맡은 단독법인이라 독자적인 마케팅 정책을 수립해 펼쳐나갈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강점”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표출했다.
국내 게임기 시장이 무르익지 않은 상황인데다 X박스 자체가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반면 이미 소니의 PS2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라 당장은 적자경영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이미 성공을 위한 투자라는 판단이 서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김순기기자 soonkkim@etnews.co.kr>
△65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65년 육군소위 임관(ROTC) △67년 재단법인 한국경재문제연구회 연구원 △68년 국회의원 윤천주 비서관 △73년 동양철관공업주식회사 상무이사(공장장) △74년 제척화학 설립 △76년 태화유운 설립 △77년 동해산업주식회사 대표이사 △80년 한국과산화공업주식회사 인수 △82년 (주)세중 설립 △86년 (주)세성항운 설립 △87년 (주)세중엔지니어링 설립 △93년 (주)세중정보기술 설립 △2000년 (주)세중컨설팅 설립 △2002년 (주)세중게임박스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