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문화사회학자 오그번은 그의 저서 ‘사회변동론’에서 한 사회 내의 물질문화와 비물질문화간 변동 속도 차이를 ‘문화지체(Cultural Lag)’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오그번의 이론에 따르면 물질문화와 비물질문화가 함께 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실제로는 물질적인 영역에서의 변화가 앞서기 때문에 정치·경제·종교·윤리·행동양식 등 비물질분야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제도나 가치관의 변화가 이를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비물질문화가 물질문화의 변동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때 심각한 사회적 부조화 현상이 야기된다.
우리나라에서 소위 ‘인텔리’로 각광받았던 IT 리더들이 각종 비리와 부패, 부정에 휩쓸려 나락으로 떨어진 사례를 ‘문화지체’에 적용시켜도 큰 무리가 없을 듯 하다. 이는 지식과 기술 분야에서는 막강한 경쟁력을 갖추고도 사회가 요구하는 책임 의식과 윤리, 합리적인 판단력 등을 갖추지 못한 데 기인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거창한 문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텔리 계층에 부여된 새로운 사회 건설과 이에 맞는 문화 창조 견인차 역할을 거부한 셈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지난 60년대 경제개발계획 이후 우리나라 경제는 노동집약 산업 중심의 성장주의로 일관해 고급 인력의 질을 따지기 전에 노동력의 양적인 공급이 시급한 시대였다. 물론 부존자원이 전혀없는 우리나라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수준높은 고급 인력을 배출해 온 대학의 역할은 제대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동안 대학이 건전한 IT 가치관과 사고를 주입시키는 데에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인하대 공대 J 교수는 “그동안 대학은 IT분야 인력 양성에 급급한 나머지 사회의 중추역할을 할 차세대에 걸맞은 인성 교육과 소양 교육은 뒷전이었다”며 “다소 늦기는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내용과 방법론에 대해 지혜를 모아야할 때”라고 관심을 촉구했다.
또 지식 정보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면서는 대학 IT교육에 대한 회의론에도 점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학생 중 라디오의 기초 회로를 제대로 이해하는 학생이 몇이나 될까?’
‘전자제품이 사소한 고장을 일으켰을 때 제대로 손볼 줄 아는 대학 졸업자가 몇이나 될까?’
‘이공계열 대학을 졸업한 학생이 관련 분야의 기초적인 계측장비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학생이 몇이나 될까?’
IT 분야 대학교수들의 자조섞인 평가다. 관련 교수들은 IT교육이 대학에서 부실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이유로 실험·실습 교육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를 테면 전자공학, 전기공학, 전자계산 등 학과에서는 전공에 따라 학과별로 실험·실습의 내용이 크게 다른 과목도 있고 여러 학과간에 유사한 과목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들 유사한 과목조차도 각 학과가 제각기 실험실을 만들고 실험실습 교육을 독자적으로 진행한다.
물론 전공과목 특성에 따라 해당 학과 고유의 실험실습 교육이 필요한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동으로 진행해도 무방한 과목까지 각 학과에서 맡아서 하겠다고 고집한다.
똑같은 내용의 실험을 하는 데 n개의 학과가 모두 똑같은 실험기구와 장치를 구비한다. 그리고 실험비가 n등분되어 각 학과에 배분된다.
그렇게 되면 각 학과의 실험실습 교육에 투자되는 재원은 적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기자재의 낙후를 면치 못하고 실험실습 교육의 수준 향상을 꾀할 수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학문간 교류를 통해 새로운 한 차원 높은 심층 연구를 기대하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됐다. 통합과 교류를 통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기는커녕 한정된 재원의 분산으로 인한 소모적 낭비 현상으로 귀결될 뿐이다.
결국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를 배출하기는커녕 새로운 사회 패러다임에 제대로 적응하지도 못하는 불량품만을 양산하고 있을 뿐이다.
기업들이 대학 졸업자를 데려다가 곧바로 써먹을 수 없다고 푸념하는 게 여전히 지속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이런 식의 IT 교육으로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 지금은 첨단 기술의 전쟁이 한창이다. 전쟁에서 소총으로 싸우는 군대와 기관총으로 싸우는 군대 중 누가 승리할 것인가는 싸워보지 않아도 결과가 뻔하다.
적어도 IT 교육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시대에 맞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대학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한다는 분명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의 나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고로 대학 스스로 개혁해야 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대학은 세계 속의 한국 건설에 앞장서기 위해 이 사회의 미래에 대한 견인 역할을 해야 한다.
선진 세계의 대학이 어떻게 고도 산업사회에 기여했고 현재 어떠한 모습으로 변신하고 있는지 눈여겨 보아야 할 때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는 한 벤처기업 CEO는 “낡은 교육과 사고로는 지식 정보사회에 적합한 IT 인재 양성과 이를 기반으로 한 IT문화 건설이 요원할 뿐”이라며 “세계와 사회, 인간에 대한 독특하고 체계적인 지형도를 제시해 현실에 감춰진 질서와 복잡성을 읽어내고 적응할 수 있는 테크로크랫으로서의 도덕적 의무감과 책임을 강제할 수 있는 교육을 통해 사회를 활성화시키고 효율성을 높일 수 있도록 새로운 원칙과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원배기자 adolfkim@etnews.co.kr>
(인터뷰) 조광섭 광운대 전자물리학과 교수
지난 93년 ‘대학과 교수사회 이대로는 안된다’를 출간, 대학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화제가 됐던 조광섭 광운대 전자물리학과 교수는 “새로운 경쟁사회에서 대학이 본연의 역할과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체질개선이 필요하지만 대학의 현재 위상은 10년 전이나 마찬가지”라고 운을 뗐다.
조 교수는 기술과 지식 중심의 정보사회에서 대학의 역할에 대해 “IT 교육 측면에서 대학의 역할은 IT의 대중화다. 이를 위한 대학의 IT 교육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다양하고 질적으로 우수한 IT 교육과 많은 우수한 인력 배출”이라고 밝혔다.
―현재 대학 IT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IT의 특성인 신속성에 대한 대학의 대응과 새로운 교육 분야로서의 대학 대처 능력의 취약함은 대학의 보수적인 성향에서 기인된다. 이로 인해 IT 교육의 여건인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빠른 변화에 대한 신속하지 못한 대응이 가장 큰 문제다.
―대학이 새로운 IT 교육 체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현대 정보사회는 IT를 기반으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IT는 현대 기술의 종합성, 변화의 신속성 그리고 일반화에 따른 대중성을 전제로 발전한다. IT의 이러한 특성은 대학의 기능과 역할에 의하여 유지·발전될 수 있다. 따라서 대학의 과학과 기술의 종합적인 개발 기능, 대학이 보유한 고급 인력의 역할 그리고 우수한 IT 인력의 양성 기능 등이 IT 산업의 미래를 보장하는 핵심이다. 특히 IT 대중화의 관점에서 대학이 새로운 IT 교육 체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건실한 IT 교육의 대안 혹은 방향은.
▲실용적 측면에서는 대학 교과과정의 과감한 개편과 IT 산업체와의 연계를 들 수 있다. 대학의 교과과정 개편은 구시대적인 관념에서 과감히 탈피하는 것으로 출발되어야 한다. 따라서 시대에 맞지 않는 교과목을 폐기하고 IT의 신속한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여 다양한 과목을 신설하여야 한다. 또 IT 산업체의 우수한 실무 인력을 교육에 적극 활용하기 위해 대학의 IT 교육이 IT 산업체에 개방되어 대학과 산업체의 긴밀한 연계 교육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내용적 측면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럴듯한 원칙론이나 도덕적 당위론에서 벗어나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교수와 학생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 구성원의 종합적인 의지와 지혜를 모아야 한다.
◆해외사례-미국 대학의 공학 교육
미국은 지난 1932년부터 대학의 공학교육을 인증하는 기관을 설치·운영 중이다.
미국내 유일한 공학교육 인증기관인 ABET(Accreditation Board for Engineering & Technology)은 공학인증위원회, 기술인증위원회, 유관기관인증회 등 3개 위원회로 구성됐다.
오랜 역사만큼 권위있는 기관으로 자리잡은 ABET는 대학의 커리큘럼, 교수진, 시설 등은 물론 대학의 교육의지까지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인증제 도입 초기 소위 명문 대학들은 이를 거절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미국 공과대학 가운데 95% 이상이 인증 제도에 참여하고 있을 정도다.
강의가 모니터링된다는 점에서 교수들의 부담이 매우 컸지만 이를 극복하고 사회적 요구를 대학 스스로 수용해 나가는 과정에서 미국의 공학교육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지난 2000년부터 공학교육 인증제를 대폭 강화하고 있다.
미국 공학교육위원회는 11개 EC(Engineering Criterion)를 발표하고 이같은 의지를 실천했다.
단편적 공학 지식보다는 지식을 종합할 수 있는 ‘창의적 설계능력’에 큰 비중을 뒀다.
즉 공학 교육 전반에 걸쳐 토털시스템을 구축하고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는 새로운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이것은 지난 2001년부터 공학교육 인증의 새로운 기준으로 활용되고 있다.
결국 미국의 공학교육 인증제는 새로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수요를 대학이 적극 수용,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IT 인재 양성의 기초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