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80)발명왕 에디슨과 전신(상)

1862년 미국의 마운트클레멘스역 부근에서 열차 하나가 궤도를 이탈했다.

 순간 여자의 단말마적인 비명이 들려왔다.

 “사람 살려요!”

 그때 그곳을 지나던 15세의 소년 하나가 움직이는 기차 앞으로 뛰어들었고, 철길에서 놀고 있던 한 아이가 그 소년과 함께 철로 밖으로 튕겨나왔다.

 궤도를 이탈한 기차는 아이가 방금 전까지 놀고 있던 그 철로 위를 쏜살같이 지나쳤고, 소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때 아이의 어머니가 달려와 자신의 아이를 안으며 소년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소년이 생명을 걸고 구한 아이는 그 역의 역장 아들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역장은 감사의 표시로 소년에게 전신(電信)기술을 가르쳐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발명왕 에디슨. 당시 15세 소년이었던 에디슨이 전신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이렇게 우연히 다가왔다.

 에디슨은 1847년 2월 11일 오하이오주 밀란에 자리잡은 작은 제재소에서 태어났다. 에디슨가의 막내였다. 그무렵 에디슨의 아버지 새뮤얼은 작은 제재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르는 밀란에서는 목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때문에 생활도 늘 빈곤했다. 에디슨이 태어난 해부터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져 형들이 신문이나 과일을 팔아 부모님을 도와야 했다.

 마침내 에디슨이 일곱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좀 더 산업이 발달한 미시간주의 포트휴런으로 이사를 했다. 생활은 조금 나아지는 듯했지만, 여전히 형들이 돈을 벌어야 생활할 수 있었다.

 포트휴런으로 이사한 다음해에 에디슨은 학교에 입학했다.

 “선생님, 2 더하기 2는 왜 4가 되나요?”

 산수시간, 에디슨의 질문에 아이들은 웃었고, 선생님은 그에게 저능아라고 말해버렸다. 그 일을 계기로 에디슨은 학교를 더 이상 다니지 않았다. 입학한 지 3개월만의 일이었다.

 그날부터 에디슨은 어머니 낸시로부터 글쓰기와 산수같은 초등학생이 배워야 하는 것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에디슨의 학습능력은 뛰어나 초등학교 전과정을 시작한 지 채 일년도 안돼서 마칠 수 있었다. 어머니의 관심과 에디슨의 노력이 빚은 결과였다.

 어느날 낸시는 한권의 책을 에디슨에게 건네주었다. ‘자연 과학자들’이라는 책이었다. 그 책은 평소에 산수를 싫어하는 에디슨으로 하여금 과학에라도 흥미를 갖도록 하기 위해 낸시가 고른 것이었다. 에디슨은 낸시의 예상보다 더욱 깊이 그 책에 빠져들었다. 작은 것을 큰 것으로 바꾸는 과학자들을 존경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발명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에디슨이 열두살 되던 해에 집안은 다시 밀란에서만큼 어려워졌다. 아버지의 사업이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내인 에디슨조차 기차 안에서 신문을 팔고 과일을 팔아야 했다. 에디슨은 그 와중에서도 기차의 화물칸 하나를 빌려 작은 실험실로 만들어 실험을 했다. 기차를 한바퀴 돌며 신문과 과일, 사탕을 팔고 나면 잠깐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그 시간에 에디슨은 책에서 배운 지식들을 직접 실험해보곤 했다.

 불. 어느날 신문을 들고 기차에 들어서려던 에디슨은 기차 꼬리부분에서 치솟는 불길을 보고 놀라 달려갔다. 자신의 실험실이 있는 화물칸이었다. 다행히 불은 쉽게 꺼졌지만, 그 일로 에디슨은 일자리와 실험실 모두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탈선한 열차에 치일 뻔한 역장의 아들을 구한 것은 그때였다. 그 사건은 에디슨에게 더없는 행운이었다. 다시 기차에서 신문을 팔 수 있게 되었고, 그 당시 최고의 유망직종이었던 전신기술을 배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기를 이용한 통신방식인 전신은 당시 모든 인류에게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변혁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우연이었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에디슨은 이미 한순간에 공간을 소멸시키는 그 첨단기술을 배울 수 있는 마음에 준비가 되어있었다. 역장을 만나기 전부터 전신의 놀라운 힘을 확신했고, 그것을 자신의 사업에 적용시킨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862년 봄. 그 당시는 남북전쟁이 일년쯤 계속되고 있었던 때라 끔찍한 전투소식들이 매일같이 신문의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4월 6일이었다. 디트로이트에 있는 ‘자유언론’지의 사무실에 도착해 신문을 뽑아든 에디슨의 눈에 머릿기사 하나가 들어 왔다. 그것은 테네시주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투와 관련된 뉴스였다. 순간, 에디슨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신문에 난 전투소식이 그날의 빅뉴스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에디슨은 기차역으로 되돌아와서 철도 전신을 담당하는 기술자와 거래를 했다. 전신기사에게 포트휴런행 노선에 있는 모든 역에 전투소식의 타이틀을 전송하고 각 역의 역장들에게 열차시간표를 적는 칠판에다 그 소식을 적어놓도록 했다. 다시 ‘자유언론’지의 사무실로 돌아온 에디슨은 직원을 설득해 신문 1000부를 사들였다. 그날 저녁, 모든 역마다 신문을 사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첫번째 역에서 에디슨은 신문을 5센트에 팔았다. 그러나 기차가 포트휴런에 도착할 즈음에는 값을 25센트까지 올려 받았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었음에도 신문은 다 팔렸다.

 전기의 힘을 이용하여 300㎞ 이상 떨어진 곳까지 바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경이로운 장치는 호기심 많던 에디슨에게 많은 관심을 갖게 했고, 그 전신을 활용하여 이룰 수 있는 힘을 그는 실제로 경험하고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중반 전신기와 철도의 팽창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열차의 운행상황을 다른 역에 전달하는 전신기사들 덕분에 사람들은 열차를 좀 더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철로망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따라서 철로변에 서 있는 기둥에 연결된 전신선 역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전신기술은 생활의 다른 영역까지도 혁명적으로 바꾸어 갔다. 신문은 전신을 이용해 멀리 떨어진 지역의 소식까지도 빠르게 전달할 수 있었다. 또한 누가 빨리 정보를 얻느냐에 따라 금전적 회비가 엇갈리는 동부지역 경제 중심지에서도 필수적인 도구로 자리잡았다.

 전신은 당시 진행중이던 남북전쟁에서도 남군과 북군 모두에게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실제로 에디슨이 전신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숙련된 많은 전신기사들이 군대에 소집되어 있었다. 덕분에 민간부문 기술자들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고, 누구보다 에디슨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전신기술의 습득은 에디슨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에디슨의 발명품 중 많은 부분이 전신기의 개량과 전화기 개량 등의 통신분야 발명품이었고, 그 원리가 되는 전기를 이용한 백열전등의 개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만일 에디슨이 전신기술을 습득하지 못했다면, 그것을 직업으로 선택하지 않았다면, 이후 그의 마법사적 발명의 폭이 매우 협소했을 수도 있었다. 전기통신기술은 특성상 동시대의 많은 기술이 통합되어 이뤄지기 때문이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