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와 타자의 논리/ 헬렌 조페 지음 /한울아카데미 펴냄
오늘날 인류는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위험의 일상화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의 선조가 안전지대에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과거 인류의 생존에 가장 큰 위협이 됐던 요인이 기상이변·질병 등과 같은 자연적 재난이었다면 현대사회에서 목도되는 위험은 핵발전소 방사능 유출사고, 우주선 폭발, 유전자 변형 식품의 부작용, 9·11 테러 등과 같이 인위적이고 동시 다발적이며 전지구적인 인재의 성격이 강하다.
헬렌 조페의 ‘위험사회와 타자의 논리’는 이처럼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심층의식 속으로 파고든 복합 위험 현상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서설이다. 이에 따르면 인류학에서부터 문화이론, 역사학에서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문영역에서 이뤄진 위험 연구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되는 바, 그것은 사람들이 처음 위험에 부닥칠 때에 ‘나는 아니다’ ‘내가 속한 집단은 아니다’ ‘잘못은 타자에게 있다’는 식으로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위험의 대상을 자신이나 자기 집단이 아닌 ‘타자(the other)’에게로 돌리며 이를 통해 걱정을 완화하는 사회적 표상을 형성하고 위험이 유발하는 불안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타자는 나와 내 집단의 순수성과 무고함을 확인시켜주는 최후 보루이자 자아의 안정감을 보존하기 위해 존재하는 집단 심리적 버팀목이다.
‘내가 아닌 타자’라는 식의 반응에 대한 최초의 고전적 사례로는 15세기께 유럽을 휩쓴 매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들 수 있다. 당시 영국 사람들에게 매독은 프랑스 두창이었고, 파리 사람들에게는 독일병, 플로렌스지방 사람들에게는 나폴리병이었다. 위험과 관련한 ‘내가 아닌 타자’ 반응의 논리는 오늘날 대중적 위험의 주범 중 하나인 에이즈에도 적용된다. 조페는 영국 및 남아프리카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심층 면접을 토대로 에이즈가 외부라는 타자를 통해 만들어지거나 전파된 것으로 여기는 현상이 일반인들에게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음을 예증하고 있다.
서구사회에서 에이즈는 ‘게이 돌림병’ 또는 ‘아프리카의 질병’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됐으며 이런 형태로 대중에게 유포됐다. 대중은 이를 통해 에이즈 위험이 문제 있는 외부집단 혹은 타자에 의해 야기된다는 관념을 형성하고 고착화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프리카 사람들 또한 서구인들과 마찬가지로 에이즈를 타자, 구체적으로 서구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타자가 지역적인 외부 집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서구 사회나 아프리카 지역 모두에서 에이즈는 부단히 그 사회 내부의 ‘그릇된 행동’ 혹은 ‘일탈적인 관행들’과도 연결지어졌다. 이같은 위험의 낙인화내지 외부화는 한 사회의 지배적 가치를 일반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타자의 논리’를 관통하는 일관된 생각은 위험을 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타자며, 그런 만큼 위험에 대해서는 ‘내가 아닌 타자가 비난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종국적 관심은 ‘내가 아닌 타자’라는 대중의 표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으며, 이러한 변화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이론은 무엇인가 하는 실천적인 문제로 향하고 있다. 저자가 대중의 표상을 형성하는 데 작용하는 미디어의 역할과 과학적 담론 등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오늘날 우리를 전방위적으로 엄습해 오고 있는 위험 및 위험 커뮤니케이션의 작동 논리와 확산과정을 분과 학문의 경계를 뛰어 넘는 총체적 접근으로 규명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위험과 관련한 학제 공조적 연구의 좋은 전형으로 평가할 만하다.
<김종길 덕성여대 교수 way21@duks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