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모스크바 인질사건의 진압과정에서 러시아당국이 독가스를 사용했는지 여부가 국제적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로 치면 예술의 전당쯤 되는 유서깊은 공연장에서 발생한 이번 인질사태는 러시아특수부대가 극장안에 주입한 정체모를 가스로 170여명이 숨지는 참극으로 종결됐다. 가스성분이 마취제냐 신경제인가는 별로 중요치 않다. 사람을 죽이면 ‘독가스’인 것이다. 핵심은 러시아정부가 테러진압을 위해 인질의 희생을 무릅쓰고 화학무기를 먼저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2차대전때 무려 2000만명에 가까운 인명피해를 겪었던 러시아의 군당국자들은 군사작전 중 발생하는 인명손실에 둔감한 편이다. 또 효과가 미심쩍은 첨단무기보다 구식이라도 검증된 무기체제를 훨씬 선호한다. 따라서 테러범과 인질을 가리지 않는 독가스를 극장안에 퍼부은 진압작전도 자신들의 군사교리에 따르면 불가피한 선택인 셈이다.
만약 뉴욕 브로드웨이의 극장가에서 이와 유사한 인질극 상황이 발생한다면 미국인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자국민의 인명피해에 극도로 민감한 미국이라면 진압과정에서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온갖 첨단기술을 총동원했을 것이다. 아마도 진압작전의 상당부분을 로봇기술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 당국은 테러와 전쟁에 투입할 로봇기술을 광범위하게 개발하고 있다. 이미 국내에 도입된 바 있는 폭탄처리 원격로봇은 구식모델이다. 의심스런 차량이나 건물 혹은 폭발물을 검색하는 작업은 모두 로봇이 동원될 전망이다. 또 테러리스트들이 인질을 억류할 경우 작은 몸집을 이용해 건물 안으로 몰래 들어가 내부정황을 샅샅이 파악하는 탐지용 로봇이 실용화단계에 들어섰다. 미국 PRI사는 마치 비디오게임처럼 조이스틱으로 다루는 저격용 로봇소총도 생산하고 있는데 이 시스템은 100m 거리에서 동전크기 목표물에 초당 한발씩 발사해 모조리 명중시키는 엄청난 정확도를 자랑한다. 미국은 이번 러시아 인질극에 자극받아 건물, 비행기 안에서 인질을 잡고 농성하는 테러범을 조기에 무력화시키는 로봇진압 기술을 이른 시일내에 확보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른바 로봇 대테러부대의 등장이다.
불행한 사실은 인질극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용가능한 모든 테크놀로지를 무차별로 사용하는 추세가 테러양상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아마도 다음번에 인질사건이 터진다면 테러범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독가스진압에 대응해 산소통을 휴대할 것이다. 또 로봇기반의 테러진압기술이 실용화된다면 테러범들은 건물 안에서 농성하는 대신 지난달 미국 워싱턴의 연쇄저격사건처럼 사회구성원 전체를 인질로 삼는 범행방식을 택할지도 모른다. 이번 모스크바 인질사건이 고전적 형태로 진행되는 인질테러극의 마지막 케이스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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