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슨이 전신기를 개량, 발전시키기 시작한 것은 전신기술을 익힌 후 여러 곳을 떠돌며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였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2중전신기 개발이었다. 2중전신기는 한개의 전선에 한대의 전신기만 연결해 사용할 수 있었던 기존의 방식을 전선 하나에 2개의 전신기를 매달아 사용하는 방식의 전신기로, 2중전신기를 활용하면 별도의 전선을 가설하지 않고도 전신 소통량을 두 배로 늘릴 수 있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당시 에디슨의 2중전신기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뉴욕에 근거지를 둔 전신기업계 신문인 ‘텔레그래퍼’지의 창업주였다. 그 신문사에서는 에디슨이 개발한 2중전신기에 대해 신문 한면 전체를 할애했는데, 에디슨과 동시에 2중전신기를 개발한 다른 2명의 발명가들도 있었지만 ‘텔레그래퍼’지와 여타 신문에 실린 기사 덕분으로 에디슨이 그 분야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에디슨은 ‘텔레그래퍼’지 창업주의 도움을 받아 뉴욕시티와 로체스터를 연결하는 전신선로를 이용해 2중전신기의 작동시험을 시행했다. 그러나 작업장에서는 잘 작동하던 전신기는 장거리 선로 시험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결국 2중전신기의 실용화는 실패로 끝나 한동안 노력을 더 기울여야 했다.
1869년. 에디슨은 전신기사로 근무하던 전신회사를 스스로 그만두었다. 근무시간 이외에 회사 장비를 이용해 실험하던 에디슨에게 신임 사장이 그 실험을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직장을 그만둔 에디슨은 동료 한사람과 합자회사인 ‘종합전신 에이전시’를 차려 ‘텔레그래퍼’지에 창업을 알리면서 자신들을 ‘전기기사이자 종합전신 에이전시’라고 소개했다. 동료는 회사 경영을, 에디슨은 기계부문의 개발을 책임졌다. ‘텔레그래퍼’지의 창업주는 보이지 않는 협력자로서 에디슨의 회사가 대중의 주목을 받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에디슨은 그때 전신기를 만들고 개량하는 일에 매달렸다. 사업 초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에디슨의 발명품에 대한 특허권에 욕심이 난 다른 회사가 그들의 회사를 사버렸고, 에디슨은 얼마간의 목돈과 함께 좀더 나은 환경에서 발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때 개발에 전념했던 것이 자동전신시스템을 개선하는 일이었다. 전신기의 부호를 문자로 자동인쇄하는 장치로, 1870년에 그 시제품이 만들어졌다.
1871년 결혼을 한 에디슨은 당시 2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신기 기술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있었다. 자동전신기와 2중전신기를 바탕으로 여러분야에서 폭넓은 발명능력을 발휘했다. 1872년과 1873년 사이에 그가 발명특허를 출원한 수는 60건에 달했다.
1874년 에디슨은 하나의 전선에 각 방향으로 두개씩 동시에 4개의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4중전신기 작업에 몰두했다. 1874년 여름, 에디슨은 4중전신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제품의 발명과 함께 소송에 휘말려야 했다. 특허권리에 대한 소송이었다. 발명은 분명 에디슨이 했지만, 그 개발에 투입된 자금을 댄 투자자들이 그 권리를 서로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에디슨은 발명능력과는 다르게 셈에는 무감각한 편이었고, 그 소송은 여러해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법정싸움에도 불구하고 에디슨의 발명가적 상상력은 전혀 시들지 않았다. 전신기뿐만이 아니라 사무용 서류의 사본을 만들 수 있는 천공펜도 개발했다. 이러한 개발품의 대가로 번 돈으로 만들어진 것이 멘로파크연구소였고, 에디슨은 그곳에서 매일 18시간 동안 일을 했던 것이다.
이후 에디슨은 1877년, 현재까지 전화기에서 사용하는 탄소송화기를 개발했고, 이어 축음기를 발명했다. 1879년에는 실용적인 백열전등을 개발해 인류를 빛의 세상으로 이끌었다. 1880년에는 백열전등을 가정에서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배전시스템을 완성했고, 1882년에는 뉴욕에서 중앙발전소를 가동시켰다. 1889년에는 활동사진용 장치들을 개발하는 등 에디슨은 평생 1100개의 발명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한편, 그 위대한 에디슨도 당대의 또 다른 천재 발명가에 의해 망신을 당한 일이 있었다. 에디슨을 망신시킨 주인공은 니콜라 테슬라라는 인물이었다.
테슬라는 110V 또는 220V로 각 가정에 전송되는 전기공급방식인 교류전류시스템과 다양한 색을 자랑하는 네온등, 형광등, 자동점화장치, 전자레인지, 자동차의 속도계, 리모트 컨트롤 등 사망할 당시 800개의 발명특허권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관심을 끄는 것은 라디오의 발명이었다.
무선통신의 선구자 마르코니가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라디오는 마르코니가 라디오에 대한 특허를 내기 10년 전에 테슬라가 이미 무선을 통해 음성과 그림을 전송할 수 있는 원리를 개발했던 것이다.
테슬라가 사망한 1943년 미국 대법원은 마르코니의 특허를 무효화했다. 하지만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라디오 발명에 관해 테슬라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마르코니의 라디오는 음성을 전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광은 아직도 마르코니에게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정부의 전신국에 근무했었던 테슬라가 18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처음 근무하게 된 곳이 에디슨의 전기회사였다. 당시 에디슨은 백열등을 갓 발명했고, 이를 실용화시키기 위해 전기를 전송하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직류방식을 통한 전송방식이었다.
하지만 에디슨의 직류방식은 여러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전기를 직류방식으로 전송하기 위해서는 전선의 두께가 매우 굵어야 하고, 거리에 비례하여 손실이 많아 전기공급소에서 수㎞ 떨어진 곳까지밖에 공급할 수 없었다.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이와 같은 직류방식의 문제점 해결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직류방식을 포기하고 교류로 전환할 것을 주장했다. 에디슨은 테슬라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결과 테슬라는 에디슨과 결별했다.
이후 웨스팅하우스사가 테슬라의 교류방식 특허권을 사들였다. 이 일은 세계 중심이었던 뉴욕에서 에디슨사와 웨스팅하우스사의 전기시스템 싸움이 벌어지는 계기가 됐다. 에디슨의 전시회사가 뉴욕 전기시장을 이미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테슬라의 교류방식이 점점 그 시장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미 직류방식을 통한 전기전송시스템에 많은 돈을 투자했기 때문에 이 싸움을 피할 수 없었던 에디슨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교류방식에 흠집을 내려 했다. 그 중 하나가 교류방식이 직류방식보다 위험하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테슬라는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에서 자신의 몸에 교류전류가 지나가게 한 후 전등을 켜는 모습을 직접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교류방식은 전기시스템의 표준으로 채택됐고, 에디슨과 테슬라의 게임은 에디슨의 패배로 나타났다.
1931년 10월 21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후버는 한사람의 죽음을 맞아 그날 밤 10시에 전국의 모든 전등을 소등하자고 제안했다. 그 당사자는 에디슨이었다.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일궈낸 위대한 발명을 통해 인류에게 편리를 제공한 에디슨에 대한 예의였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 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