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희 엔터프라이즈부 차장 changhlee@etnews.co.kr
12월 1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국 정치판에 이합집산이 계속 되고 있다. 정계 개편, 후보 단일화, 구국의 결단 같은 근사한 이름으로 스스로를 포장한 철새 국회의원들이 이리저리 당을 옮기느라 야단법석이다.
국민과 언론은 더이상 비난의 눈초리조차 보내지 않고 있다. 명분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 동안 크고 작은 선거를 앞두고 늘상 벌어지는 정치권의 ‘이벤트’로 이제는 무감각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지난 13일(현지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콘센터에서 폐막된 ‘오라클월드 2002’ 행사에서 세계적인 다국적기업인 오라클과 HP가 큰 일을 벌였다. 각각 기업용 솔루션과 컴퓨터 시스템 분야의 선도업체인 양사는 기업용 솔루션산업의 새 패러다임으로 부상하고 있는 웹서비스시장에서 패권을 잡기 위해 강력한 공조체제를 구축키로 합의했다. 오라클이 HP의 유닉스 및 윈도 서버에 최적화된 웹 애플리케이션 서버(WAS)를 개발해 HP 고객에 무료로 공급한다는 것이 골자다.
복잡한 이야기를 빼고 말하면 오라클과 HP가 이번 제휴를 통해 그동안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해온 문제점을 해결했다는 점이 관심을 끈다. 미들웨어부문에서 ‘넘버3’던 오라클은 1위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HP는 웹서비스 분야에서 아킬레스건이던 WAS 문제를 일거에 해결했다. 한마디로 양사가 모두 이익을 얻는 윈윈전략의 전형을 보여준 사례다.
오라클과 HP의 제휴나 한국 정치권의 철새떼 현상은 적어도 그 목적과 행태에서는 비슷하다. 한쪽이 시장에서의 리더십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라면 다른 한쪽은 권력 획득이 목적이다. 서로 도움이 된다면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으며 그 밑에 도움이 되지 않는 카드는 과감히 버린다는 냉혹한 논리도 깔려 있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오라클과 HP는 각각 소신과 비전을 버리기보다 이를 완성하기 위한 전략인 반면 철새떼는 그동안 누누이 떠들던 소신과 비전을 헌 신짝처럼 버렸다는 것이 다르다. 오라클과 HP는 최상의 솔루션을 제공하겠다는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선택했지만 철새의원들은 당원과 국민과의 처음 약속은 아예 염두에도 없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오라클과 HP의 제휴는 말 그대로 ‘모두 이기는 윈윈전략’이지만 우리 국회의원들의 이합집산은 하나가 이기면 다른 하나는 질 수밖에 없는 제로섬 게임이거나 모두 패자가 되는 공멸을 향한 질주다. 한국 정치권의 수준이 오라클이나 HP 같은 글로벌기업에도 못미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닫게 돼 씁쓸하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간 빅딜이 추진되고 있다. 두 후보 진영이 대권을 잡기 위해 후보단일화를 논의하고 있다. 막판에 후보가 누구로 결정되든 논의 과정이나 최종 결정에 있어서 노 후보, 정 후보, 그리고 국민이 모두가 승자가 되는 트리플 윈을 실현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