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반도체업계 `하소연`

 “사실 기자들 만나는 일보다 돌아오는 어음 결제하는 게 더 급합니다. 꼬박꼬박 다가오는 월급날은 최악이죠. 아랫돌 빼서 윗돌 막는 상황입니다.”

 인터뷰 시간을 맞추지 못한 기자를 원망이라도 하듯 모 반도체설계 벤처기업 사장은 첫 서두를 이렇게 시작했다. 시중 자금시장이 경색되면서 요즘에는 운영자금용 급전(?)을 구하는 데 대다수의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금방이라도 터져줄 것 같았던 시장은 잠잠하고 초기에 유치했던 자금은 바닥이 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기업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종업종 기업에 회사를 넘기고 싶어도 인수합병(M&A)의 문화가 자리잡지 못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그의 또다른 하소연이었다. 이대로 가다가 애써 개발해온 기술과 고급인력을 사장시키고 마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도 크다고 했다.

 IMF 이후 설립된 120여 반도체 설계벤처기업의 앞날은 이처럼 ‘풍전등화’다. 한국의 실리콘밸리를 꿈꾸며 앞다퉈 창업한 벤처들이 하나둘씩 결과물을 쏟아내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열매를 받아줄 시장과 시스템업체들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 없다. 물론 일부는 상용화에 성공해 결실을 맺고 있지만 대다수의 벤처기업은 생사의 기로에서 모진 찬바람을 맞고 있다.

 반면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강화하고 있는 대기업들은 전문 기술인력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국제 매물로 나온 하이닉스반도체는 말할 나위없다.

 한 임원은 “정부의 근시안적인 벤처정책으로 인해 핵심인력은 모두 빠져나가고 외국에서 인력을 끌어와야 하는 국가적 위기를 불러오고 말았다”며 정부를 원망했다.

 벤처기업과 대기업의 이같은 상반된 반응은 SoC산업이 커지면서 이미 예견돼온 일이었다. 기술을 팔겠다는 벤처기업과 하나에서 열까지를 모두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대기업의 생리를 보면 특히 그렇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서로의 입장만 되풀이해서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의 탓만 할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산학연이 한자리에 모여 지혜를 짜 모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산업계의 한 원로의 말씀이 가슴에 다가온다.

 <산업기술부·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