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31년(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잡은 일본은 1894년 6월 1일, 주한 공사 오토리(大鳥圭介)를 통해 내정개혁안 5개조를 제시하고 이를 시한부로 시행할 것을 촉구했다. 조선 국왕은 이를 거부하고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여 자주적인 내정개혁을 시도했다.
이에 일본공사는 6월 21일, 1개 연대 이상의 일본군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포위하고 국왕을 협박, 마침내 내정개혁을 의결하고 추진하는 기관으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했다. 영의정 김홍집이 총재관을 겸하고, 의원에는 박정양·김윤식·유길준 등 17명을 임명하였으며, 그 밑에 서기 2명을 두었다.
군국기무처에서는 먼저 중앙관제를 개혁하여 크게 궁내부와 의정부로 나누고, 의정부에는 총리대신을 두어 행정수반으로 삼게 했다. 의정부 밑에 내무·외무 등 8아문을 설치하고, 궁내부와 각 아문의 장관을 대신, 차관을 협판이라 하는 등, 관제와 지방행정을 비롯한 행정·사법에 관한 규칙을 심의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폐기하고, 종래의 중국기년(中國紀年)을 바꾸어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사용하도록 했다. 또한 문벌·반상·노비를 없애고, 조혼을 금하며, 여권신장, 과거제와 연좌제 폐지 등, 6월 26일부터 시작하여 12월에 폐지될 때까지 많은 부문의 개혁을 심의하였다. 이처럼 나라의 모든 정무에 대한 심의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군국기무처는 왕권이나 정부의 권력보다 더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강력한 세력으로 발족 초기 3개월 동안 의결된 법안만 해도 208건에 이르렀던 군국기무처의 위원 중에는 김학우(金鶴羽, 1862∼1894)라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한글 전신부호를 만든 인물이다.
김학우는 함경도 경흥에서 태어나 홀어머니 아래 살다가 열살 때쯤 어머니와 함께 작은아버지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했다. 김학우가 러시아로 이주한 1871년과 1872년에는 흉년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러시아와 만주로 이주하던 시기였다.
김학우가 러시아에서 어떻게 자랐고, 어떻게 1876년부터 2년 동안 일본 도쿄에서 러시아어 교사를 하면서 일어를 배우게 됐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로 돌아온 뒤인 1878년부터였다. 1876년 일본과 맺어진 강화도 조약으로 개국한 조선으로서는 러시아말과 일본말, 중국말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김학우오 같은 인재가 대단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필연성으로 김학우는 1882년 서울로 오게 되었고, 많은 인사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1884년 가을, 그는 전신에 대한 현황파악과 기술습득을 위해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다. 1884년 일본이 부산과 장기간에 해저 전선을 개통시킨 데 자극받은 김학우가 조선도 전신을 가설해야 한다고 국왕에게 건의했고, 국왕은 이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를 일본으로 파견하여 전신을 연구하도록 했던 것이다.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 김학우는 이미 최초의 근대기술기관인 기기국 관리 자격이었다. 또 그는 그해에 생긴 최초의 화폐 제조기관 전환국의 위원을 겸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 정부에서는 1883년에 기기국·전환국·박문국 등의 새로운 기관을 설치했는데, 모두 새 기술을 수용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그 기술에 대한 지식을 가진 외국인을 초빙했다. 이 때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기술적 소양을 갖춘 김학우의 활약은 눈부실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 도착한 김학우는 다른 한사람과 도쿄로 가서 매일같이 전신본국을 찾아가 연구하여 전신 부호를 개발했다. 당시 만들어진 한글 전신부호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독창적인 전신부호였다. 당시 김학우가 만든 한글 전신부호는 1888년 조선전보총국이 설립되면서 ‘전보장정’에서 한글 전신부호의 모체로 채택됨으로써 본격적으로 활용되었고, 몇개의 부호만 변경된 채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1885년 1월, 일본 파견을 마치고 귀국했을 당시에도 전신가설에 대한 국왕의 태도는 변화가 없었다. 김학우는 국왕의 명을 받들어 학생을 모집, 전신기술을 가르치면서 전신가설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행운도 따랐다. 개파화의 일원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김학우의 일본행은 1884년 겨울에 있었던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에 연루되지 않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1885년 여름. 드디어 인천과 서울, 의주를 거쳐 중국과 연결시기키 위한 서로전신선 가설공사가 가시화됐다. 조선 측에서는 이 방면의 전문가이며 중국어를 잘하는 김학우가 실무대표로 참여하게 되었고, 전선 가설공사의 협의를 위해 상하이를 방문하기도 했다.
김학우가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 당시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던 윤치호를 만난 기록이 ‘윤치호일기’에 남아 있다. 돈에 쪼들리던 윤치호는 1885년 여름에 김학우를 만나 일주일 동안 잘 얻어먹었으나, 막상 그가 돈을 좀 꾸어달라고 하자 공금뿐이라면서 이를 거절했다는 내용이다. 같은 기록에 의하면 1886년 김학우가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중국의 원세개가 그를 죽이려 한다는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1885년 가을에 서로전신선 가설이 마무리되었지만 김학우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곧바로 서울과 부산을 잇는 남로전신설 가설공사가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로전신선 가설 준비과정에도 참여하게 된 김학우는, 정부가 서로전신선의 가설공사처럼 중국측에 가설공사 전체를 맡기려 하자 조선정부가 독자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청국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한·러 밀약사건에 연루되어 1886년 8월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전신기술에 관해 전문지식을 갖고 있던 김학우는 전신사업에 계속 관여하여 조선의 전신사업 발전에 공헌했고, 이런 가운데 1894년 6월 군국기무처의 위원으로 선임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학우가 참여한 군국기무처는 이내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소장개화파와 대원군파간의 갈등 때문이었다. 대원군은 비록 개화파 정권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소장개화파들의 개혁정책에는 상당한 이견을 갖고 있었다. 대원군은 개화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소장개화파들의 개혁은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생각했다. 또 대원군파와 소장개화파는 권력을 놓고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도 김학우는 소장개화파의 일원으로 대원군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군국기무처의 업무는 시간이 갈수록 각 세력간의 갈등으로 정파간의 틈은 더욱 크게 벌어졌다. 결국 군국기무처는 10월 29일 마지막 회의를 가진 뒤 사실상 유명무실해짐에 따라 갑오년의 개혁도 그 막을 내렸다.
1894년 10월 31일. 심야에 김학우의 집으로 자객 하나가 숨어들었다. 그리고 신물문 수용과 독창적인 한글 전신부호를 만들며 새로운 조국을 위해 애쓰던 김학우의 꿈도 그 자객의 칼에 의해 싹둑 잘려버렸다. 32세의 젊은 나이였다. 대원군을 둘러싼 수구세력의 짓으로 알려졌지만, 확실한 전말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김영근/한국통신문화재단(KT 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