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메모리반도체산업 육성을 위해 정부가 무엇을 했냐고 따져 물으면 관계부처 담당자들은 억울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책과제를 추진중이고 시제품 제작을 위한 셔틀런서비스까지 제공하는데 웬말이냐 하겠죠. 그러나 대형 건물을 세울 때처럼 골조공사에서부터 인테리어까지 상세설계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정부의 육성책은 마치 산발적으로 땅만 파는 형국입니다.”
정부의 비메모리반도체 관련정책을 두고 반도체업계의 한 원로가 한 말이다.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정책에 문제점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얼마 전 대만의 공업기술연구원(ITRI) 시찰단이 방한해 국내 비메모리반도체업계를 돌아본 적이 있었다. 시스템온칩(SoC)과 관련해 업계 기술현황과 정부지원책을 알아보기 위해 온 이들은 내년부터 시작할 대만의 SoC산업 육성 프로젝트 ‘Si-Soft’에 대해 한마디했다.
이들에 따르면 민관 컨소시엄으로 2007년까지 진행되는 이 사업에는 벤처캐피털과 해외투자가들이 참여해 1차연도인 2005년까지 3억달러(한화 4600억원)의 자금이 투입된다. 이를 통해 무선 네트워킹, CPU와 DSP, 광반도체 등 핵심설계자산(IP)을 개발하고 다국적 반도체업체까지 유치해 세계적인 SoC 디자인센터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이미 비아·SiS·미디어텍 등 유명 설계업체들과 TSMC·UMC 등 세계 선두의 수탁생산(파운드리)업체들을 보유하고 있는 대만이 SoC기술까지 확보하려 나선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업계는 저인망식 협력체계를 갖춘 대만이 설계에서부터 생산에 이르기까지 원스톱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면 한국을 비롯한 경쟁국 업체들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고 큰 우려감을 나타냈다.
사실 정부가 마냥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메모리반도체산업의 기반 강화을 위한 ‘시스템 집적반도체 기반기술 개발사업(시스템IC 2010)’과 ‘IT SoC 산업기반 조성사업’ 등은 정부주도의 대표적인 프로젝트다.
하지만 문제는 정부의 산업육성책이 항상 하향(톱다운)방식이어서 산업계와의 화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또 투입자금도 예산범위내에서 제한적으로 이뤄지면서 규모도 작고 상용화를 위한 실탄으로 작용하지 못한 채 생색용으로 그치고 있다.
실제로 98년 착수된 1단계 ‘시스템IC 2010’의 경우, 5년이 다 되도록 상용 가능한 기술을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내년에 시작되는 2단계 사업과 관련해서는 상용화에 초점을 맞출지, 기반기술 확보에 주력할지의 여부를 놓고 아직도 결정을 미룬 채 고민하고 있다.
또 2010년까지 13년 동안 민간과 정부가 합해 총 8000억원의 자금을 투입할 예정이지만, 하이닉스반도체와 벤처기업들의 행보가 불투명해지면서 자금조달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IT SoC 연구개발(R&D)을 위한 인프라 구축과 설계인력 양성에 초점을 맞춘 IT SoC 산업기반 조성사업은 사업주체인 정보통신부와 산업자원부의 협력체계 미흡으로 시너지 효과를 배가시키지 못하고 있는 정부의 대표적인 프로젝트로 꼽히고 있다.
특히 벤처기업을 위한 공동시설 활용과 시제품 제작서비스 등은 상대적으로 호응을 얻고 있지만 마케팅이나 광범위한 해외 네트워크 구축 등 실질적인 지원책은 빠져 있어 부처 이기주의로 비롯된 결과가 아니냐는 지적도 받고 있다.
업계 전문가들은 “기술개발에서부터 상용화, 자금유치에서 해외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정부와 업계, 학계가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뛰어난 프로젝트도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며 정부·학계·업계의 체계적이고 거시적인 육성책 마련을 당부했다.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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