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과 중국뿐만이 아닙니다.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도 산업계와 정부, 대학이 혼연일체가 돼 기술개발과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D램 1위국이라는 표상에 안주하는 동안 경쟁국들은 철저히 무장하고 뒤쫓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아시아 국가를 돌며 산업시찰에 나섰던 정부 산하기관 관계자의 말이다. 정부의 ‘동북아 허브’ 정책의 기초자료 조사차 이들 국가를 방문한 그는 우리가 얕잡아 보았던 동남아 국가들까지 아시아 경제·산업·물류의 전진기지로 발돋움하기 위한 기반조건을 갖췄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이미 상당수 다국적업체가 진출해 현지화했고 중국시장을 겨냥한 대응책도 짤 짜여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는 이를 토대로 정보기술(IT)을 중심으로 한 경쟁국들과의 차별화 전략이 시급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한국의 비메모리반도체산업을 두고 위기를 논하는 것은 이같은 경쟁국들의 움직임 때문이다. 광범위한 글로벌 네트워크로 PC용 칩세트에서 수탁생산(파운드리), 시스템온칩(SoC) 설계로 재무장하는 대만과 두세달에 한개씩 반도체 공장이 들어서는 중국, 그리고 중동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제조 및 물류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려는 동남아 국가들의 행보는 말 그대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바로 그것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전자·IT기기의 디자인·생산이 아시아로 넘어오는 만큼 반도체 설계에서부터 생산, 패키징과 테스트 등은 물론, 반도체가 탑재된 시스템의 제조, 물류에 이르기까지 현지화하겠다는 것.
일본도 만만치 않다. 도시바·히타치·NEC 등 대표주자들이 D램사업에서 손을 털고 시스템 기술을 기반으로 비메모리반도체 분야로 사업을 재편하고 있다. 이들은 또 중국과의 연대를 통해 제2의 일본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도 갖고 있다. ‘c벨트’를 추진중인 후쿠오카현 등 지방자치단체들은 세계 반도체시장의 80%를 차지하는 비메모리반도체를 중심으로 새로운 ‘산업의 쌀’을 찾아 나서고 있다.
반면 우리는 아직도 메모리반도체 중심의 편향된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D램을 중심으로 반도체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수출 1위 품목’이라는 표면적인 수치에만 안주하는 것이다.
최근 산업자원부 발표에 따르면 올해에도 반도체부문의 무역수지 적자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10월 말까지 누적집계된 올해 반도체 수출은 135억6500만달러. 그러나 수입은 무려 141억1000만달러에 달한다. 지난해 D램 가격이 급락하자 적자로 전환됐고 올해 가격은 회복했지만 대외의존도가 심각한 이동통신용 반도체 수입이 늘면서 연속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메모리에 편중된 기형적 구조가 화를 자초하는 것이다.
세계 반도체시장의 리더인 인텔이 설립 당시에는 메모리업체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기혁신을 바탕으로 이제는 IT시장의 핵심엔진을 제공하는 솔루션업체로 변모했다. “어려울 때 투자하라”는 인텔 창시자 고든 무어의 명언은 끊임없이 미래를 대비해 준비하는 실리콘밸리 벤처기업들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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