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벨은 과학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의 하나로 평가받는 전화를 발명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전화를 만든 사람은 벨뿐만이 아니었다. 벨 이외에도 시카고 출신의 직업적 발명가 엘리사 그레이(1835∼1901)가 있었고, 탁월한 기계공이었던 토머스 A 웟슨이 있었다.
그레이는 당시 전신분야의 전문 발명가로 전화에 대한 특허권리를 놓고 벨과 한동안 소송을 벌인 인물이고, 웟슨은 이미 잘 알려진대로 벨과 전화로 첫 통화를 한 사람이다. 특히 그레이는 벨과는 별도로 전화를 개발했으나 두 시간여의 차이로 벨의 특허가 먼저 접수되는 바람에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사람이기도 하다.
1856년에 모스가 개발한 전신기와 부호를 사용해 전보사업을 하는 회사가 설립되었다. 웨스턴유니온이었다. 웨스턴유니언은 유사이래 가장 신속하고 정확하게 아주 먼곳까지 소식을 전달하는 전신사업을 독점운영해 설립과 동시에 최고기업 중 하나로 부상했다.
1877년. 웨스턴유니언에 자신이 개발한 특허권을 팔겠다는 사람이 방문했다. 그가 팔려고 하는 특허품은 전선을 통해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계였다. 10만달러. 웨스턴유니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전신이 전기를 이용한 통신분야에서 계속 확고한 지위를 누릴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말하는 장난감기계대신 하나의 전선에 여러개의 전신기를 운영할 수 있는 다중전신에 더 많은 실용화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때문에 웨스턴유니언은 에디슨이 발명한 다중전신기의 특허권을 사들였다.
당시 웨스턴유니언의 내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검토서가 작성되었다.
“말하는 기계는 통신수단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많은 결점이 있다. 이 기계는 탄생순간부터 전혀 가치가 없는 물건이었다.” 말하는 기계. 전혀 가치가 없는 물건으로 평가받은 것은 전화였다. 그리고 그 특허권을 팔기 위해 웨스턴유니언을 방문했던 인물은 바로 벨이었다.
특허권을 파는 데 실패한 벨은 스스로 회사를 설립, 직접 전화사업을 시작했다. 전화사업은 웨스턴유니언의 예측과는 반대로, 직접 목소리를 전달하는 그 장난감같은 특성으로 인해 급속히 확대됐다. 벨은 1885년에 장거리전화기술 개발과 서비스를 담당하는 자회사인 AT&T를 창립하고 사업영역을 전 미국으로 넓혔다.
한편, 웨스턴유니언의 전신사업은 전화에 밀려 사양길을 걷게 되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후 웨스턴유니언은 벨에 대응하는 전화회사를 설립하려고 시도했지만, 그 회사는 특허권 시비로 법정에 불려다니다 결국 회사 자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벨은 1847년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출생했다. 에든버러대학교를 나온 후, 런던대학교에서 의학을 연구했고, 음향학 연구에 뜻을 두고 1870년 발성법 교사였던 아버지와 함께 캐나다로 건너갔다. 1871년에 미국 보스턴으로 이주한 벨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아에게 발성법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1872년 그는 보스턴에 농아학교를 개설했고, 자신도 그곳에서 강사로 일하다가 1873년에 보스턴대학의 음성생리학 교수가 되었다.
발성법에 관심이 높았던 벨은 헤르만 헬름홀츠의 음성과 감각에 관한 실험에 대해 공부한 뒤 전신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전기의 특성을 이용한 통신방식을 통해 농아들에게 소리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벨은 직업적 발명가가 아니었다. 때문에 발명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자신의 일을 가지고 있었기에 발명에 따른 부담이 없었다. 발명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벨에게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이지 않았다. 벨에게 발명은 분명한 재미였다.
이 과정에서 벨은 조화(調和)전신기를 고안했고 1875년 4월 다중전신에 관한 특허까지 신청했다. 이 조화전신기와 다중전신을 개선하기 위한 벨의 노력이 전화를 발명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벨은 기계 제작에는 아주 문외한이었지만, 기계 수리공이며 모형 제작자였던 토머스 웟슨을 만나면서 개발을 신속하게 진척시킬 수 있었다. 당시 벨이 겪었던 고민은 그 시대 발명가들의 전형이었다. 19세기 미국은 발명가들의 시대였다. 많은 발명가들이 신기하고 유용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지만, 그것을 시제품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그들은 작업장을 이용하여 그곳에 고용된 장인들의 도움을 구해야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스턴 법원가에 자리한, 전기장치를 전문으로 하는 한 작업장이 벨이 도움을 받는 곳이었다. 그 작업장에 고용되어 있던 사람들 중에 손재주가 능했고 발명가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었다. 토머스 A 웟슨이었다.
벨은 1874년 자신이 제작중인 장비를 고치려고 그 작업장을 찾았고, 그때 처음으로 웟슨을 만났다. 이후 벨이 많은 일거리를 맡기자 작업장의 주인은 웟슨에게 벨의 일을 전담하게 했고, 이후 벨과 웟슨은 동료이자 일생의 친구가 되었다. 1875년에 벨은 스물한살의 웟슨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고, 함께 일한 지 1년만에 벨과 웟슨은 전화를 발명했다.
발명 당시 주변 사람들 모두는 전화의 실용화 가능성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다중전신에 더 많은 비중을 두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벨은 농아에게 말을 가르치는 데 관심이 많았기에 다중전신보다는 음성을 전달하는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로 전화를 발명할 수 있었다.
1876년 2월 14일. 벨은 자신의 설계 중 하나를 우선 특허사무소에 제출하고 전화 품질 개선에 노력했다. 그해 3월, 벨은 개선된 유체송신기를 스케치했고, 스케치한 그 송신기를 웟슨이 기계로 만들었다. 다음날 둘은 보스턴에 있는 자신들의 하숙집 옥상에 자리를 잡았다. 방 하나는 숙소, 다른 하나는 실험실이었다. 새로운 유체송신기가 벨 앞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옥수수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 안에는 부식성이 매우 강한 산이 들어있었다.
이전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 각각은 멀리 떨어진 방에 따로 자리를 잡았다. 그때 벨의 음성이 급하게 들려왔다. 벨의 옷에 산이 엎질러졌기 때문이었다.
“웟슨씨, 이리 좀 와보게.”
웟슨은 그 말을 또렷하게 들었다. 전화로 전달된 최초의 메시지로, 그 말은 역사가 오랫동안 잊지 못할 말이 되었다.
벨과 웟슨이 개발한 전화기는 송수화기가 모두 전자석의 극(極) 근처에 있는 엷은 철판을 진동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으로, 음성이 진동판을 진동시키면 유도전류에 의해 수화기 끝에서 음성이 재생되도록 되어있었다. 벨은 이 발명을 토대로 1877년 벨전화회사를 설립했으며, 전화의 발명으로 받은 볼타상(賞) 기금으로 볼타연구소를 창설, 농아교육에 힘썼다.
벨은 이후 전화의 성능향상에 노력했고, 축음기 개량, 비행기 연구, ‘사이언스’지 창간 등 여러가지 방면에 업적을 남기고 1922년 사망했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 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