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자락에선 2002년도 다사다난한 한 해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침체된 경기 속에서 각 업체들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을 쳤어야 했다. 작게는 내수로 때론 수출을 지상명제로 삼았다. 급변하는 기술흐름 속에서 혁신적인 기술을 주무기로 삼기 위한 시도 또한 지난한 몸짓으로 다가왔다. 대동소이한 것 같지만 세부적으로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던 IT업계의 명암을 각 분야별로 점검해본다. 편집자
올해 우리나라 전자산업은 전체적으로 ‘전약후강’의 모습을 보여줬다.
9·11 테러사태의 여파로 불안한 출발을 보이면서 상반기 내내 침체의 늪에서 허덕였지만 ‘IT월드컵’을 표방한 2002 한일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계기로 7월부터 수출이 두자릿수 증가세로 반전되는 등 하반기 들어 전자산업 전반에 걸쳐 회복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는 것.
최근 산업연구원은 전자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 역시 상반기에는 실질 GDP성장률이 5.8%에 그쳤지만 하반기에 6.3%로 높아져 연간으로는 6.1%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지난해 말 내놓은 전망치 3.7%를 크게 상향하는 수치다.
이처럼 올해 우리 경제가 6% 수준의 안정적인 성장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지난해 세계 경기침체의 직격탄을 맞아 크게 흔들렸던 전자산업이 휴대폰 등 주요 IT품목의 수출이 예상외로 빠른 회복세를 보이며 버팀목 역할을 톡톡히 해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특히 상반기까지만 해도 정부가 당초 목표로 정한 수출 1600억달러와 무역수지 흑자 70억달러는 ‘이뤄질 수 없는 꿈’으로 인식됐으나 휴대폰과 반도체라는 막강한 ‘원투펀치’를 앞세운 전자산업이 하반기 들어 두자릿수의 높은 수출증가율을 기록하면서 꿈이 현실로 이뤄졌다.
실제 올해 우리나라 전체수출은 휴대폰을 포함한 무선통신기기(39.0%), 반도체(16.4%), 컴퓨터(15.7%), 가전(12.5%) 등 주요 IT품목이 두자릿수 증가세를 기록한데 힘입어 지난해보다 7.7% 증가한 1620억달러에 이르렀고 무역수지 흑자규모 또한 당초 예상보다 많은 11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산자부는 추정하고 있다.
올해 전자산업 수출은 이처럼 당초 예상을 웃도는 ‘기대 이상의 성적표’를 받았다. 그러나 수출과 달리 상반기 반짝했던 내수경기가 하반기 들어 크게 위축되면서 품목별·시장별·업체별로 희비가 크게 엇갈렸다.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원투펀치’로 불리는 반도체와 휴대폰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간판품목인 반도체의 경우 올해 당초 기대와 달리 소폭 성장에 그쳤다. 반면에 휴대폰은 사상 유례없는 대호황을 누렸다. 특히 수출에선 비록 월간 기록이긴 하지만 11월에는 휴대폰이 사상 처음으로 반도체를 제치고 월간 수출 1위 품목에 오르는 이변이 연출됐다.
이런 가운데 올해 반도체부문에선 하이닉스-마이크론의 합병무산과 동부-아남반도체의 합병 등 굵직굵직한 일이 많았다. 디스플레이부문에선 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 LCD)가 브라운관을 대체하며 30% 이상의 고성장을 시현했으며 LG필립스와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5세대 라인을 잇따라 가동하며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일반부품부문은 휴대폰을 제외한 전방산업의 총체적인 불황, 중국 및 동남아산 저가 제품의 발호와 일본업체들의 가격공세 등으로 대부분 경영실적이 목표치에 미달하는 부진을 보였다.
국내 이동전화단말기 시장은 보조금 규제에도 불구하고 컬러단말기 교체수요에 힘입어 사상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세계시장에서는 3세대 이동통신서비스 도입의 지연으로 주요 업체들이 고전하는 가운데도 삼성전자가 하이엔드 시장을 휩쓸며 국내 업체들이 크게 선전했다. 특히 중국 CDMA 단말기 시장의 개방으로 국내 업체들의 수출물량이 크게 늘어났다.
내년에도 이동전화단말기 시장전망은 밝은 편이다. 시장조사 및 업체들에 따르면 내년 시장은 올해보다 10% 이상 성장할 전망이다. 유럽 등 주요 국가들이 3세대 서비스 도입을 서두르고 있고 중국도 단말기 수요가 크게 늘어날 전망이어서 수출 기상도도 밝다. 다만 중국 및 대만의 로컬업체들이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어 대책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올해 국내 네트워크시장의 경우 전반적인 경기위축의 여파로 지난해에 이어 부진한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통신사업자와 기업들의 네트워크 인프라에 대한 투자위축으로 수주물량 확보를 위한 업체간 가격인하 경쟁이 격화되면서 네트워크장비 업체들의 수익성 또한 악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가운데서도 하반기 들어 통신사업자들이 차세대 네트워크(NGN)와 VDSL에 대한 투자를 본격화하고 있으며 기업시장에서도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네트워크 분야에 대한 투자가 꾸준히 늘고 있어 향후 내년도 시장 전망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중대형컴퓨팅 시장은 지난 5월 한국HP와 컴팩코리아가 통합되면서 3분기 이후부터 한국IBM·한국HP·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 3강체제로 시장이 굳어질 가능성이 더욱 짙어졌다. IA서버 시장의 경우 리눅스 붐을 타고 개미군단을 형성한 국내 화이트박스 업체들의 부진과 삼성전자의 서버사업 정비, 인텔코리아 채널의 매출 급성장으로 시장의 대표주자들이 부각된 해였으며 스토리지시장은 히타치 계열의 효성인포메이션시스템의 약진이 두드러진 한해였다.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통신·금융·유통 대기업의 정보화 프로젝트가 꾸준히 이어지면서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DBMS), 전사적자원관리(ERP), 고객관계관리(CRM) 등의 솔루션 수요를 창출했다. 또한 다국적 정보기술(IT)기업들이 중견·중소기업용 솔루션 시장으로 수요처를 넓히면서 국내업체들을 크게 위협했다. 국산 솔루션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소프트웨어 공급가격과 컨설팅비용을 내세우고 제휴 및 합병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갖춤으로써 다국적 IT기업의 중견·중소기업용 솔루션 시장공세에 대응했다.
국내 문화콘텐츠 시장은 게임산업의 경우 온라인과 모바일게임 시장은 급신장 추세를 보인 반면에 아케이드와 PC게임시장은 침체를 면치 못했다. 또 2월 소니의 PS2 등장으로 시작된 비디오콘솔게임시장은 기대만큼은 성장하지 못했지만 가능성을 보여줬다. 애니메이션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창작열기가 뜨거웠지만 자금확보 한계 등으로 기대만큼의 작품을 볼 수는 없었다. 음반시장은 소리바다 등 P2P서비스 강세로 시장확대에 한계를 보였다.
가전업계의 가장 큰 이슈는 고급가전 시장의 급성장을 들 수 있다. 양문형냉장고와 드럼세탁기가 이미 혼수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았고 프로젝션TV와 PDP, LCD TV 등의 판매가 급성장했다. 특히 지난 5월과 6월 월드컵 특수를 통해 디지털TV 판매가 크게 늘어 큰폭의 성장을 거뒀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에 힘입어 올 가전시장은 약 7조∼7조5000억원 규모를 형성할 것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내년에는 미국 경제불안과 불경기, 특별한 이슈가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올해보다 약 5% 내외의 소폭 성장이 예상된다.
한편 내년도 우리 경제의 기상도는 한마디로 ‘시계 제로’ 상태다. 그도 그럴 것이 신정부가 출범하는 가운데 세계 경제회복과 IT 수요회복, 중국의 고성장 등 긍정적인 요인과 내수위축, 미·이라크사태, 중국과의 경쟁심화 등 불안한 요인이 상존할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 전자산업은 내년에도 올해와 마찬가지로 전약후강의 판세를 이어갈 전망이다. 침체국면이 지속되고 있는 세계 IT경기가 내년 하반기부터나 본격 회복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김종윤기자 jykim@etnews.co.kr>
■연구소·기관들이 본 내년 IT경기
최근 국내 경제연구소 및 관련 기관·단체가 내놓는 전기·전자 등 IT산업에 대한 내년도 경기전망을 종합해 보면 올해보다 다소 나빠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따라 일선 업계서는 내년도 사업계획을 보수적으로 운용하는 등 대응전략 마련에 부산한 모습이다.
◇연구소 및 기관·단체별 전망=가장 최근 발표된 자료인 전자산업진흥회의 ‘내년도 전자산업 수급전망’에 따르면 전자산업은 수출은 물론, 내수, 생산 모두 올해 성장률을 밑돌 것으로 관측된다. 반면 수입 증가율은 올해보다 3배 가까이 늘어날 것이라는 분석이다. 본지 12월3일자 16·17면 참조
경제연구소들의 전망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IT산업의 차세대 주자로 각광받는 이동통신단말기 역시 내년도 내수와 수출은 각각 올해보다 각각 15%포인트, 5%포인트씩 성장률이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IT산업의 바로미터격인 반도체에 대한 산업연구원의 전망 역시 어둡다. 산업연구원은 내년도 반도체 수출과 생산증가율을 각각 12.8%, 13.8%로 내다보고 있다. 이는 올해보다 3.1%포인트, 11.1%포인트씩 각각 하락한 수치다.
수출만을 따로 예측한 무역협회의 전망에서도 전반적 하락 조짐은 쉽게 감지된다. 지난달 무역의 날을 맞아 발표된 내년도 수출전망에 따르면 컴퓨터·이동통신기기 등 산업용 전자의 경우 내년 수출은 318억달러로 12.3%의 증가율이 예상된다. 이는 올해 추정 증가율인 24.1%보다 크게 떨어지는 수치다. 반도체 등 전자부품 역시 10.7%로 올해 대비 1%포인트 감소할 전망이다. 가전제품은 3.8%로 1.4%포인트 하락이 예견된다는 게 무역협회의 분석이다.
◇전망의 배경=국내 경제연구소와 관련 기관·단체들이 이와 같은 전망을 내놓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요인은 내년도 세계 경제에 대한 불확신이다. 이는 곧 선진국 IT산업의 급격한 회복을 기대할 수 없게 한다. 내수보다는 수출위주로 편제돼 있는 우리 IT산업의 구조상 이는 성장에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분석이다. 산업연구원의 주대영 박사는 “그동안 고성장을 지속해온 국내 IT산업의 특성상 매년 30% 이상의 성장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사실상 이는 실질적 하락국면으로 봐야한다”고 말했다. 8일 현재까지 본지가 입수한 각종 전망자료중 30%대 이상의 성장 전망치를 내놓은 곳은 현대경제연구원 한곳뿐이다. 대다수 IT 성장전망치는 10%대 내외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대응 전략=뚜렷한 계기나 이상현상이 없는 한 내년 IT경기는 하반기께 가서나 다소 살아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일선 업체에서는 세계 경제의 흐름과 그에 따른 수급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대응전략을 탄력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근 들어 삼성, LG, SK 등 국내 주요 그룹 역시 연구개발(R&D)과 글로벌 인재 육성 등을 통한 핵심역량 강화에는 내년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는 원칙이지만, 불확실한 경영환경에 대비해 설비투자 확대나 신규시장 참여 등에는 신중한 입장을 취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내년에는 저성장 기조에 따른 일선 업체의 생존전략이 업체간 합종연횡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일웅 삼성전자 전무는 “소수 최상위 업체의 시장지배력 강화로 인해 내년에는 업체별 명암이 보다 극명하게 갈릴 것”이라며 “이에 따라 업체간 제휴와 매각 등 재편작업이 가속화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정부 역시 기존 IT산업 육성의 기본 골자인 ‘공급측면’에만 지나치게 편향된 정책에서 탈피, 정부가 직접 나서 공공수요를 촉진시키고 신규소비를 개발하는 등 ‘수요측면’을 강화하는 발상의 전환이 이뤄져야한다는게 관련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국내 IT산업은 수출경기에 큰 영향을 받는 만큼 환율·금리의 안정적 운영,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노력 강화 등 정책적 뒷받침도 필수 사항으로 꼽힌다.
<류경동기자 ninano@etnews.co.kr>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2003년 산업별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