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학교 주변에 위치한 프랑스의 한 PC방.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PC방에서 카운트스트라이크, 워크래프트 등의 PC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파리 중심의 샤를 드골 에투알 광장. 1806년 한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거대한 개선문이 위용을 뽐내며 우뚝 서 있다. 이 개선문에서부터 12개의 거리가 방사선 모양으로 뻗어있는데 그 중 콩코르드 광장를 잇는 2㎞의 넓은 대로가 바로 샹젤리제 거리다. 강대국 프랑스를 상징하는 개선문과 루이 16세 내외를 이슬로 사라지게 했던 단두대가 있던 장소 콩코르드 광장, 프랑스 역사를 상징하는 두 장소를 잇는 샹젤리제 거리는 파리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빼놓지 않고 둘러보는 명소 중 명소다. 곳곳에 고급 부티크가 넘쳐나고 아름다운 노천카페로 수놓아져 있는 샹젤리제는 그야말로 파리의 문화를 잉태해 내는 진원지라는 평이 아깝지 않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제는 프랑스 자존심의 거리, 샹젤리제에도 미국 문화가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모습이 적잖게 눈에 띈다. 맥도널드는 물론이고 디즈니 캐릭터 상품, GAP캐주얼 브랜드까지 고급 부티크를 비집고 개선문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곳에서 영업하고 있다.
콧대 높다던 파리지앵들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려고 극장 앞에 길게 줄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불과 5∼6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장면이다.
지금의 샹젤리제 모습은 현재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는 프랑스 게임산업을 은유하는 듯하다. 프랑스는 거대 미디어 그룹인 비벤디유니버설을 비롯해 인포그램스, 유비소프트 등 세계 굴지의 게임 퍼블리셔들의 본거지로 유명하다. 프랑스업체들은 전통적으로 게임개발보다는 게임 퍼블리싱쪽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왔던 것이다.
세계 게임산업을 쥐락펴락했던 이들 업체가 근래들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비벤디 등 프랑스업체들은 올해초부터 끊임없이 인수설, 매각설 등 각종 시장루머에 시달렸고 이 시끄러운 틈을 타 EA(Electronic Art)를 비롯한 미국 퍼브리셔들은 유럽은 물론 세계시장 장악력을 급속도로 키워나가고 있다. 마치 철옹성처럼 보였던 개선문 앞에서 ‘메이드 인 USA’ 제품들이 팔려나가는 것처럼.
게임산업에서는 원래 미국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프랑스 퍼블리셔들의 위기는 곧바로 미국업체들에게는 기회가 됐다.
프랑스 퍼블리셔들의 위기는 기업성과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스닥 주가를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미국 퍼블리셔인 EA의 지난 52주간 주식 변동폭을 보면 50.50∼72.44달러(13일 기준 주가 56.70달러)인 데 반해 비벤디유니버설의 같은 기간 변동폭은 8.90∼57.90달러로 급격한 추락세를 보였으며 폭락의 충격에서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한 주당 15달러(13일 기준 주가 15.65달러)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인포그램스도 마찬가지다. 1주당 8달러를 호가하던 주식이 13일 현재 1.99달러에 머물고 있다(52주간 변동폭 1.14∼8.15달러). 실제로 유럽의 유력한 조사기관인 스크린다이제스트는 최근 게임유통에서 EA가 독주하고 있다는 내용의 조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프랑스 퍼블리셔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는 게임사업 자체보다 유동성 위기를 맞은 데 대부분의 원인이 있다. 비벤디유니버설의 게임사업부만 해도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워크래프트’ ‘엠파이어어스’ ‘하프라이프’ 등 세계적으로 수백만장씩 팔린 게임들을 개발한 블리자드, 시에라 등 알짜배기 개발사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2위의 미디어 기업인 비벤디그룹은 위성, 인터넷 등 각종 미디어와 통신사업, 수력사업 등을 모두 보유한 거대회사로 게임사업부는 전체 사업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잘 나가는 게임사업부도 그룹의 향방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비벤디는 지난해 대대적인 인수합병을 추진한 결과 올 상반기에만 부채 350억유로, 순손실 120억유로를 기록하는 등 최악의 유동성 위기를 맞았다. 지난 7월에는 2001 회계연도 순익을 부풀렸다는 혐의로 프랑스 증권 당국에 적발돼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됐다.
프랑스 제1의 공업도시 리옹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인포그램스도 최근 본사 직원을 60% 이상 감원하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인포그램스의 한 인사는 “미국 게임시장이 워낙 커서 본사 직원은 줄이고 경영 중심축을 미국으로 옮기려는 작업을 진행중”이라고 해명했으나 인포그램스는 최근까지만 해도 한 게임업체의 매수설이 나오는 등 위기의식이 고조돼 있는 상태다.
‘네버윈터나이츠’ ‘롤러코스트타이쿤’ ‘언리얼토너먼트’ 등 풍부한 타이틀을 보유한 스타 퍼블리셔 인포그램스 역시 인수합병으로 커 온 회사다. 그동안 그렘린(Gremlin), 필립스미디어(Philips Media) 등을 합병해왔으며 지난해에는 유력한 유통회사 하스브로인터랙티브(Hasbro Interactive)까지 인수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지난해말부터 IT붐이 꺼지고 신규산업에 대한 프랑스 금융권의 투자열기가 싸늘해지면서 덩치를 키워오던 인포그램스도 심각한 자금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레이맨’ ‘레인보식스’ 등 미주와 유럽을 강타한 히트작들을 퍼블리싱하고 있는 유비소프트의 경우 별다른 유동성 위기없이 선전하고 있으나 실적은 역시 좋은 편이 아니다. 회계연도가 시작된 지난 4월부터 9월까지 실적이 8360만유로로 작년 동기 1억1340만유로보다 크게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 게임산업의 대표적인 협회인 리옹게임에서 상근하는 피에르 카르데는 “그동안 몇몇 프랑스 게임업체들이 인수합병을 통해 덩치를 키워오는 데 주력하다보니 시장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면서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이틀을 많이 갖고 있는 퍼블리셔들인 만큼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들업체가 그동안 키워온 게임산업의 노하우는 현재 프랑스게임업계의 밑거름이 되고 있기 때문에 게임분야에서 프랑스업계의 영향력은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PC에서 콘솔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라인업으로 세계게임산업을 주도했던 프랑스 퍼블리셔들의 위기는 장기화되고 있다. 현재 비벤디의 새 회장으로 선임된 장 르네 푸르투 회장은 게임사업부를 포함해 120억유로에 해당하는 자산을 매각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재무구조 개선책을 추진 중이다. 실제로 비벤디는 마이크로소프트, EA, 소니 등과 접촉해 게임사업부 매각에 관한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인포그램스도 최근 그동안 거래해오던 은행을 프랑스계에서 미국계 은행으로 바꾸면서 자금의 숨통을 틔운 것으로 알려졌으나 업계에서는 현재의 위기를 해소하는 데는 다소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프로게이머 선망 열풍 움트는 프랑스
중학교 3학년생인 로난. 방과후 친구와 함께 프랑스 리옹에 위치한 인포그램스를 방문하기로 했다. 산업시찰이 가능한지 여부를 문의하기 위해서다.
프랑스에서는 중학교 3학년이 되면 한 달간 산업시찰을 다니도록 커리큘럼이 정해져 있다. 일종의 견학 프로그램으로 개인의 진로를 정하고 미리 현장에서 체험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다.
로난이 세계적인 게임 개발회사인 인포그램스를 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IT분야 전문가가 꿈인 로난은 특히 게임개발부터 유통, 판매에 이르는 전과정을 옆에서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산업시찰을 하고 싶은 곳으로 게임회사를 선택한 학생은 로난만이 아니다. 로난의 학급 20명 중 5∼6명이 게임회사에서 수업받기를 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병원, 약국, 선거위원회가 주류를 이룬 것과 비교하면 실로 대단한 변화다.
회사 사정이 여의치 않은 탓에 인포그램스로부터 제안을 거절당한 로난은 낙담하면서도 이내 “다른 게임회사를 알아봐야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렇게 프랑스에서는 게임회사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게임에 쏟아지는 인기는 그대로 제작사의 인지도 상승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계적인 게임 퍼블리셔가 프랑스에 집중돼 있다 보니, 프랑스인 입장에서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에는 프로게이머에 대한 관심도 급증하고 있다. 국내에서 프로게이머로 활동중인 베르트랑은 프랑스 내에서도 유명하다. 프로게이머가 첨단 직종으로 인식되면서 젊은층에서는 이들에 대한 동경과 함께 토너먼트 게임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인터넷카페는 젊은이들이 즐겨찾는 명소가 됐다. 프랑스를 포함해 스위스, 벨기에 등지에서 프랜차이징 사업을 벌이고 있는 넷커넥트의 알렉스 발카니 사장은 “현재 프랑스에만 500개 가량의 인터넷카페가 성업중이며 최근들어서는 한 달에 하나씩 생기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발카니 사장은 “내년쯤 콘솔방도 오픈할 예정”이라고 말해 프랑스 게임산업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을 것임을 시사했다.
물론 아직은 통신 사용료가 높은 것이 흠이다. 유럽만 놓고 보면 프랑스의 초고속망 보급률은 상위권에 속하는 편이지만 프랑스텔레콤의 독점체제여서 가격이 쉽게 낮춰지지 않고 있다. T1급 회선을 얻으려면 매달 900달러, ADSL은 70달러를 내야 한다. 케이블회사가 별도로 있지만 통신망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프랑스텔레콤을 경유해야 하므로 더 이상 가격하락은 힘든 상황이다.
프랑스는 결코 서두름이 없다. 2시간 넘게 식사하는 문화가 프랑스를 대변하듯, 프랑스는 게임을 비롯한 IT기술 수용에 있어서도 서두름이 없다. 그만큼 서서히 수용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도는 다르다. 프랑스만의 독자적인 색채로 문화에 깊숙이 침투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발카니 사장은 “프랑스에서 게임은 일회성 유행이 아니라 축구처럼 친근하고 일상화되고 있다”며 “근접 국가에 비해 수용속도가 느린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그만큼 우리의 색깔을 가져간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이라고 강조했다.
<파리·리옹(프랑스)=정은아기자 eajung@etnews.co.kr 류현정기자 dreamshot@etnews.co.kr>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12월 게임타이틀 판매순위(모든 플랫폼 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