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블레이드’가 한·일 양국에서 방송되는 작품이다 보니 양국의 정서를 골고루 담아야 했다. 기획초기에 일본에서는 강민, 카이, 레이, 맥스 말고 닌자를 주인공으로 넣고 싶어했다. 일본 생각에는 범세계적이고 재미있을지 몰라도 국산 애니메이션에서 닌자 주인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우리의 의견대로 닌자는 빠졌고, 한국 방송에 맞도록 작품 기획단계부터 한·일 양국의 문화적 차이를 조율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SBS 김재영PD의 도움이 컸다. 일본도로 차선은 한국과 정반대다. 일본은 기모노, 유가타 같은 전통 옷을 잘 입는데, 한국에선 그것을 카우보이 복장처럼 문화로 보지 않고 왜색이라는 금지기준으로 대한다.
배경에서 일본어로 적힌 간판이 있다면 해당 장면을 CG로 처리하거나 그것조차 안되면 삭제해야 했다. 기획단계부터 양국의 방송을 겨냥한 공동제작은 양국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이러한 노력은 어린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라이센시 업체들에도 큰 호응을 받았다.
액션 팽이 탑블레이드는 물건이 없어서 못 팔았으며, 신발 의류 문구 등 제품은 물론이고 팽이모양의 탑블레이드 과자까지 나오게 되었다. 손오공이 자체개발한 PC게임은 인기정상을 차지했다. 인기 대폭발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탑블레이드’로만 만족했다면 인기몰이는 지속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2년이 넘은 지금까지 아직까지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후속작품 제작에 있다.
현재 SBS에서 방송 중에 있는 ‘탑블레이드V’는 ‘탑블레이드’의 후속 작품이다. 이 시리즈는 전작에 비해 극본과 콘티를 국산화시키는 데 역점을 뒀다. 한·일 합작 애니메이션의 경우 한국에서 극본을 쓰더라도, 상대적으로 콘티를 잘 그리는 일본인 콘티감독에게 일을 맡기기 위해 일역을 하게 된다. 이때 번역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고 시간도 더뎌진다. 이점을 극복하기 위해 ‘탑블레이드V’는 작가시스템을 달리했다.
한국 내 작가 말고 일본에 체류중인 한국인 중에서 작가를 물색했는데, 그때 방송작가 출신 유학생 손상희가 눈에 띄었다. 그의 합류로 일본작가와 극본회의를 통해 집필하는 방식이 채택됐다. 콘티(스토리보드)도 한국에서 많은 화수를 제작하도록 했다. 하지만 앞으로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분야라는 걸 깨달았다.
이번에 배운 극본과 콘티 제작의 노하우는 언젠가 순수국내 작품에서 꽃을 피울 거라고 믿고 있다. ‘탑블레이드V’는 한국의 리프로덕션, 희원 엔터테인먼트의 활약으로 작품스케줄에 차질이 없도록 제작되었다. 전작에 비해 캐릭터가 작아졌고 여자 어린이들을 위해 솔미라는 헤로인을 만들었다. 캐릭터 비례가 줄어들었으니 역동적인 액션보다는 팽이의 파워풀한 회전력에 비중을 두게 되었다. 이야기 연령대가 낮아지면서 시청자 층이 넓어졌다.
‘탑블레이드V’가 올해 7월 말 첫 전파를 탈 무렵에 시청률 부담이 상당했다. 월드컵 때문이었다.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에 오르자 아이들은 축구공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삼삼오오 거리마다 벌어진 축구 열풍은 탑블레이드의 인기를 수그러뜨리는 것 같았다. 거기다가 게임과 인터넷이 애니메이션 시청을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송을 시작하면서 눈물겹게 확인한 것은 아이들이 ‘탑블레이드’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액션 팽이 탑블레이드처럼 실내외에서 전천우로 즐길 수 있는 놀이는 쉽게 잊혀 질 수 없나 보다.
<손오공 이은미PD oz@sonoko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