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 철옹성 같던 필리핀의 조지프 에스트라다(63) 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뜻밖에도 문자메시지서비스(SMS)였다. 마닐라 시민 수십만 명이 휴대폰 메시지를 통해 연락을 취하며 대통령 궁 앞에 집결해 ‘부패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데에는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과학저술가 하워드 라인골드는 CNN방송이 전하는 필리핀 시민들의 데모장면을 지켜보면서 휴대폰으로 대표되는 이동통신이 정보기술(IT) 혁명을 이끄는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직감했다. 80∼90년대 PC와 인터넷을 주제로 20여권의 저서를 펴내면서 그동안 IT혁명이 우리 생활을 바꾸는 장면을 기록으로 남겼던 라인골드는 최근 이통 네트워크와 유비쿼터스 컴퓨팅·방송 등의 결합이 몰고올 변화를 집중 조명하는 작업을 벌였다. 지난 10월 미국에서 발간된 ‘똑똑한 군중(smart mobs)’은 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본지는 신년을 맞아 세계 최고 과학저술가로 활약하고 있는 하워드 라인골드와 전자메일 대담을 통해 최근 IT혁명을 가속화하는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는 휴대폰 및 이통 기술에 대한 비전을 들어봤다.
―선생님은 그동안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던 첨단 과학기술을 일반 대중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들려주는 과학저술가(science writer)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날리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펴낸 ‘똑똑한 군중(smart mobs)’은 30여년 저술활동을 결산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전세계에 있는 독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기대 이상입니다. 책이 나온 후 약 2달 동안 미국 MSNBC방송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전세계 주요 매스컴들과 직접 인터뷰한 것만도 족히 10여건 됩니다. 또 경제 주간지인 비즈니스위크와 전문 출판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퍼블리셔스 위클리(Publisher‘s Weekly) 등 각종 잡지들도 최근 많은 지면을 할애해 ‘똑똑한 군중’에 대해 서평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이에 힘입어 책 판매도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고 독자들의 반응도 매우 호의적입니다.
―최근 정보기술(IT) 발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컴퓨터와 통신, 방송 등을 구분하는 것은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들 3가지 기술이 하나로 통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최근 우리가 들고 다니는 휴대폰을 꼽을 수 있습니다. 최근 이동통신 서비스가 제3세대(G) 기술로 전환하면서 휴대폰으로 음성은 물론 사진과 게임 등 멀티미디어메시지(MMS)를 주고받는 것이 최근 전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개인은 이제 산간벽지를 걷거나, 군중 속에 파묻혀 있더라도 휴대폰과 개인정보단말기(PDA) 등으로 초고속인터넷 접속과 위성방송 등을 통해 최신정보를 확인해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필자는 이러한 변화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기존 고정관념의 틀에 얽매여서는 안된다고 판단해 ‘똑똑한 군중’을 새 책의 제목으로 선택했습니다.
―‘똑똑한 군중’이라는 용어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적절한 사례를 곁들여 설명해 주십시오.
▲필자가 ‘똑똑한 군중(?)’을 처음 맞닥뜨린 것은 2000년 봄, 일본 도쿄 여행에서였습니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도쿄의 최고 번화가인 신주쿠 거리를 걷고 있는데 사람들이 휴대폰을 들고 음성통화를 하는 대신 무엇인가 열심히 쓰는 것을 본 것입니다. 바로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전화기로 사람의 음성이 아닌 데이터를 주고받는다는 것이 충격이었습니다.
휴대폰을 통해 주고받는 메시징 서비스의 가공할 만한 위력은 서로 얼굴도 모르는 개인들이 무리(군중)를 지어 자유롭게 의사를 교환하면서 일사불란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면 부패정권을 하루아침에 쓰러뜨리고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권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지난 91년 필리핀의 조지프 에스타라다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낸 것이나 최근 한국에서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모두 젊은 세대가 휴대폰과 인터넷 등을 통해 자신들의 이해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들의 사례를 통해 그동안 일반인들이 무질서하게 모여 있는 한 무리의 집단을 의미했던 군중도 첨단 이통기술을 무장하면 ‘전문가 이상으로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가설을 새삼 확인한 것이지요. 바로 ‘똑똑한 군중’의 출현입니다.
―휴대폰으로 대표되는 이동통신 기술이 80년대 PC와 90년대 인터넷 등과 같은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는 (선생님의)주장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최근 전세계 청소년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멀티미디어메시징서비스(MMS)도 일시적인 유행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며 혹평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인골드=지금의 메시징 서비스는 앞으로 이동통신 기술이 가져다 줄 변화와 비교하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우선 휴대폰만 보더라도 앞으로는 음성 및 데이터를 전달하는 통신 단말기뿐만 아니라 각종 정보를 처리하는 컴퓨터의 역할까지 겸하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휴대폰을 초고속 인터넷에 접속하면 이동중에도 전세계에 연결되어 있는 컴퓨팅 자원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슈퍼컴퓨터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최근 전세계를 여행하면서 이통기술이 가져다주는 변화를 피부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 일본과 유럽에서는 휴대폰으로 미혼 남녀들이 맞선을 보도록 연결해주는 이통 서비스가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 원리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NTT도코모 등의 가입자들이 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맞선을 보기로 한 상대자가 근처에 나타나면 양쪽 휴대폰에 불이 켜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화제를 바꿔보겠습니다. 전세계에서 이동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역인 이통 사업자들은 최근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휴대폰을 통해 초고속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3G 투자를 계속 연기할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이통 사업자들의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낳지 않을까요.
▲옳은 지적입니다. 최근 전세계 이통업계가 겪고 있는 불황은 분명히 우려할 만한 수준입니다. 유럽 이통업체들은 2000년 실시한 주파수 경매대금이 고스란히 부채로 남아 3G 투자를 엄두도 못내고 있습니다. 또 6개 이통업체들이 난립해 있는 미국 이통업계도 최근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더욱이 최근 이들이 겪고 있는 불황이 기술도입 및 마케팅 전략 부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비롯됐다는 점에서 단기간에 해결하기도 어렵습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는 소비자들의 취향을 이통 서비스 업체들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시대에 뒤떨어진 통신 관련법과 제도도 한몫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특히 휴대폰 전화를 받는 사람도 전화요금을 내야 하는 미국의 이동통신 가입자들은 받는 전화를 사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음성전화는 물론 메시징 등 데이터통신 서비스를 확산시키는 데에도 큰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통업체들이) 빠른 시간 안에 불황을 극복할 수 있는 묘책은 없을까요.
▲이통 불황을 극복하는 것이 어렵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최근 빠르게 발전하는 이통기술을 활용하면 엄청난 수익을 보장해주는 응용서비스(킬러앱)들을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습니다. 최근 일본과 유럽 등에서 큰 인기를 얻는 멀티미디어메시지서비스(MMS)에 이어 위치정보 등의 부가서비스들이 잇달아 성공하면 이통업체들의 불황은 의외로 빨리 끝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통서비스를 사용하는 일반 소비자와 기업들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먼저 3G 이통 서비스가 가져다줄 최상의 혜택은 기술이 아니라 이를 통해 바뀌는 우리 삶의 방식이라는 점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동중에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 영상회의를 하면서 비즈니스 상담을 할 수 있는 3G 이통시대에 대비해 철저하게 준비하는 기업(사람)들은 큰 기회를 잡고, 그렇게 하지 못한 기업(사람)은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워드 라인골드는 누구인가
미국 오리건 주에서 태어난 하워드 라인골드(56세)는 어릴 적부터 과학소설(SF)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을 탐독하며 과학저술가의 꿈을 키웠다. 포틀랜드 시에 있는 대학(리드 칼리지)에 다닐 때에도 과학저술가로서 폭넓은 교양을 쌓기 위해 심리학을 공부했다.
라인골드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철공소 직원, 타이피스트, 접시닦기 등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역시 저술가로 활동하는데 상상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진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제록스 팰러앨토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던 알란 케이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기고한 논문 ‘미세전자공학과 PC(Mocroelectronics and the PC)’를 읽고 e메일을 보낸 것이 뜻밖에 그를 채용하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그에게 맡겨진 업무 또한 바로 팰러앨토연구소의 첨단 연구결과를 쉽게 풀어쓰는 것이었다.
◆대표저서
라인골드는 제록스 팰러앨토연구소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무려 20여권에 달하는 정보기술(IT) 관련 저서를 펴내 과학저술가로서 명성을 쌓는다. 이들 중에 지난 85년 시몬 앤 셔스터 출판사에서 펴낸 ‘생각의 도구(Tool for Thought)’는 당시 막 보급되던 개인용 컴퓨터(PC)가 우리 생활의 지평을 얼마나 넓혀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호평을 받았다.
또 이어 80년대에 출간된 가상현실(Virtual Reality:터치스톤, 1993년)과 가상공동체(The Virtual Community:MIT, 1994년)는 인터넷이 가지는 사회·문화적 의미를 다각도로 분석했다. 이들 책은 프랑스·독일·중국·일본·스페인 어 등으로 번역되어 전세계적으로 약 20만권이 팔렸다.
이번에 출간한 똑똑한 군중(Smart Mobs:퍼세우스, 2002년)은 30년 저술활동을 결산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지난 10월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세계 독자들의 반응도 매우 호의적이다. 미국은 물론 일본과 한국, 유럽 등 해외에 거주하는 독자들 중에서 신간을 모두 읽고 웹사이트(http://www.smartmobs.com)에 자신의 의견을 올리는 독자들로 팬클럽까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