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역대 정권의 IT정책은 기업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기보다는 즉흥적이고 전시효과를 중시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정부는 현실성 있는 정책수립을 위해 간담회나 공청회 등을 활성화하고 산업계의 목소리를 정책에 적극 반영해 시행착오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산업계가 차기 정부에 주문하는 중요한 사항 중의 하나는 현장성의 강화다. 지금까지 역대 정부는 업계에 필요한 다양한 정책을 수립, 시행해 왔지만 피부에 와닿지 않은 전시성 정책이 많았다. 업체들이 받아들이기에 당황스러운 정책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지난해 바이오인포매틱스 SW개발업체들은 정부의 예산지원사업에 참여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했다. 정부가 바이오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바이오인포매틱스SW를 개발할 업체를 공모했으나 지원액이 터무니없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총 19개 SW를 개발하는데 정부가 내놓은 금액은 고작 총 5억원에 불과했다. 웬만한 SW 하나 개발하는데도 1억원 이상의 개발비가 소요되는데 유전자분석·신약탐색 등 첨단기술을 필요로 하는 바이오인포매틱스 SW개발에 평균 2600만원을 지원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게 업체들의 불만이었다.
한 업체 관계자는 “예산 책정 전에 조금이라도 업체의 목소리를 들어봤어도 이런 터무니 없는 금액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한마디로 말해 관료들이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탄했다.
이와달리 터무니없는 예산을 지원한 경우도 있다. 정부가 80억원을 지원해 전자통신연구원에서 개발한 3D온라인 게임엔진의 경우 대표적인 현장정책 부재의 연구개발과제로 꼽히고 있다. 이 엔진은 성능이 기대 이하라는 온라인게임업체들의 평가와 함께 채택을 기피하고 있어 예산만 낭비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게임업체 한 관계자는 “철저히 상업적이어야 할 게임엔진을 정부출연연구소에 맡긴 것부터 문제였다”며 “그냥 기업체에 맡겼으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게임엔진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정책부재를 질타했다.
정부가 청소년 이공계 기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이공계 대학생 해외유학제도 역시 현실을 무시한 정책이라는 지적이 있다. 대학 관계자들은 정부의 공언대로 1000명씩 해외로 내보낼 경우 우수한 인력이 해외로 대거 빠져나가 국내 대학 및 대학원의 질저하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차라리 여기에 쓰이는 예산을 국내 이공계 대학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투입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우수한 두뇌들이 해외로 자꾸 빠져나갈 경우 대학의 경쟁력 저하는 물론 결국 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뻔한데 정부는 ‘언발에 오줌누기’식의 임시방편적 처방만 내놓고 있다는 게 대학측의 논리다.
이처럼 역대 정권의 IT정책은 기업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기보다는 즉흥적이고 전시적인 효과를 중시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료 및 교수들에 의해 수립된 정책들은 결국 산업 전반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많은 예산의 낭비 및 시행착오를 불러왔다. 정부가 현장성있는 정책수립을 위해 간담회나 공청회 등을 마련해 여론을 수렴하고 있지만 대부분 이미 만들어진 정책을 통보하는 자리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높다.
한 벤처기업 사장은 “의견수렴 과정이 형식적이며 어떤 안건을 제안해도 검토해보겠다고만 할 뿐 정책에 반영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며 “때문에 요즘에는 부처에서 개최하는 간담회는 참석하지 않고 있다”며 불신감을 드러냈다.
이러한 정부에 대한 불신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정권 인수위원회를 구성할 당시에도 수많은 말들이 오고갔다. 그 중 하나는 인수위원의 대부분이 교수일색이라는 비판이었다. 기업들은 예전처럼 일선 현장과는 동떨어진 현실성이 결여된 정책을 계속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감을 나타냈다.
물론 이러한 인적구성이 정권수립까지 지속되지는 않겠지만 노무현 행정부의 정책적인 기조의 바탕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하는 기업인도 많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차기 정부에서는 이러한 정책이 계속되지 않기를 바라며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정책을 수립할 것을 당부했다. 최영락 과학기술정책연구원원장은 정부의 정책수립 및 결정시스템의 하향 위임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 원장은 “하위직 공무원이 직접 발로 뛰고 전문가가 돼야 현장에 맞는 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며 “또 이를 위해서는 결재과정이 대폭 생략돼야 할 것이며 사무관급이 실질적인 정책결정권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양한 인력풀을 이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충북대 최중범 교수는 “교수진만 해도 충분한 인력이 포진해있는데도 소수 몇 인물에만 정책을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그동안 구축된 다양한 인력풀을 활용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정책수립과정에서 소외됐던 기업인을 폭넓게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기업인의 경우 본래의 업무에 쫓기다 보니 타 부문의 전문가들에 비해 정책수립과정에 참여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차기정부에서는 실물경제에 정통한 기업인들의 참여폭을 넓힐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허종도 하이윈 사장은 “산업계가 정책수립 및 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며 공청회 등도 대규모보다는 소규모 업계 좌담회 등을 수시로 개최, 산업계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정책목표를 정하고 달성과정을 담은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기인 산업기술진흥협회 정책팀장은 “현안이 터지면 다급하게 정책을 수립하다보니 정책이 겉돌아 현실과 괴리를 보이는 것이 문제”라며 “정부가 업계가 힘을 모아 체계를 만들고 이에 따라 정책을 수립한다면 시행착오를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권상희기자 shkwon@etnews.co.kr>
<도움말 주신분>
최영락 과학기술정책연구원장, 한기인 산업기술진흥협회 기술정책팀장, 최중범 충북대 교수, 이상천 영남대학교 총장, 허종도 하이윈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