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즈루를 나선 것은 거의 11시. 검은 승용차들이 차례로 간부들을 태우고 간 후 택시를 잡으려는데 누군가 팔을 잡는다. 옆자리에 앉았던 게이샤댜.
“음, 웬일이야?”
“저… 손님이랑 같이 가면 안될까요?”
정면으로 본 게이샤의 눈이 총명하고 담대하다.
“이름이 뭐지?”
“도모에라고해요.”
“나는 네 나이 두배보다 더 많은데….”
“괜찮아요.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나 아저씨하고 사귀고 싶어요.”
귀여운 여자다. 그러나 이 세상의 마지막 날 여자의 부정한 액체를 몸에 묻혀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피를 차게 한다.
“무슨 상관이에요.”
택시에 앉아 집으로 향하는데 젊은 아가씨의 말이 떠오른다. 어딘가 귀에 익다. 그렇다. 에리카….
에리카를 만난 것은 대학교 3학년 여름이었다. 도쿄역의 명물 야에스서점에서 책을 고르다 부딪힌 것이 인연이었다. 당시 일본의 경제학계는 아직 마르크스 경제학이 주류였고 경제학 전공인 아키라도 자연히 좌파사상에 기울어 있었다. 이는 남몰래 관심을 가지고 있던 재일 조선인운동과 잘 맞물려 들어 그날도 책방에서 재일조선인에 관한 책을 서서 탐독중이었다.
에리카와는 곧 정이 들어 가을 무렵 매일 보지 않고는 못견디게 되었다. 마침 도쿄대와 오차노미즈 여대는 가까운 거리여서 고서점이 많은 간다의 다방이 만남의 장소였다. 그해 1968년 10월,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일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책을 좋아하던 둘은 흥분하여 다방에 앉아 문학을 이야기하던중 에리카가 뜬금없이 묻는다.
“그런데 우리가 야에스서점에서 부딪혔을 때 왜 재일조선인에 관한 책을 그렇게 정신없이 읽고 있었지?”
이 말에 아키라는 피가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어려서부터 근본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숨기라는 교육을 받아온 터다. 하지만 자존심과 정의심이 강하여 거짓말도 싫다. 깊이 사랑하게 된 일본 처녀 에리카. 그녀에게 조선인의 후예라고 말하면 그것으로 끝일까? 마르는 입을 차로 적시고 짧은 순간이지만 고민끝에 입을 연다.
“에리카, 나 사실은 우리 할아버지가 조선반도에서 왔어.”
에리카는 놀라 검은 눈을 크게 뜨고 동시에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다물지를 못한다. 아키라의 담배가 반은 타들어갈 시간의 침묵이 지난 후 에리카는 조용히 속삭인다.
“무슨 상관이야. 아키라를 사랑하고 존경해. 내겐 그것만으로 충분해.”
아키라에겐 어린 시절부터의 강박에서 풀어주는 면죄부이자 해방의 노래와 같은 말이었다. 그 후로 아키라는 에리카를 여자라기보다는 동반자로 사랑했다.
1999년 6월 2일 새벽, 기치조지(吉祥寺) 아키라의 자택.
집에 들어선 것은 새벽 1시 반. 오랜만에 불단에 앉아 향을 올린다. 영을 부르는 종을 치고 할아버지 히로시를 생각한다. 아키라를 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 되뇌이던 할아버지. 조직폭력단의 간부가 된 아들에 대한 분을 삭이느라 술로 몸이 망가지고 그리워하던 부산에 발을 디뎌보지 못하고 세상을 뜬 불쌍한 노인. 그리고 지금 기요세의 결핵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 오사카 교향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미모와 지성을 뽐내던 재일교포 사회의 꽃. 그리고 이 꽃을 시들게 한 반항과 아집의 인간 아버지.
이들의 자식으로 살아온 52년의 인생. 더 필 수 있는 자신의 꽃을 스스로 꺾으려는 아키라에게 드디어 설움이 북받친다. 불단 앞에 무릎을 꿇고 한동안 흐느낀다. 떨어진 눈물이 미색 다다미의 색을 노랗게 바꾸고 식은 몸을 부르르 떨며 아키라는 불단 앞에서 몸을 일으켜 서재로 간다.
조부에게서 받은 시집들, 모친의 피아노 악보, 통신업에 관한 기술서적 등 한 벽을 빼곡이 메운 책들이 형광등 불빛에 낯선 사람들처럼 얼굴을 내민다. 한권 한권에 담긴 장면들을 떠올리며 맨 아래칸의 일기책들을 꺼낸다. 철이 든 중학생부터 꾸준히 적다가 사십대 후반이 되어 손을 멀리한 일기책이 대학노트로 수십권이다. 자신의 고뇌의 역사다. 앉은 채로 마지막 날의 심경을 몇자 적는다. 일기 쓰는 것도 오랜만이다.
생을 정리하며 일기책들을 두고 갈 수는 없다. 멍하니 책장을 바라보다 쇼핑백에 담아 라이터를 찾아 들고 밖으로 나간다. 태우기 위해서다. 3분이면 이노가시라 공원이다. 큰 호수가 있어 종이를 태워도 안전하다. 아파트의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을 통과하는데 뒤에서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걸움을 세운다.
“어머머, 후지사와상 아니세요? 노부코에요. 아니 새벽 두시가 넘어 웬일이세요?”
막 벤츠에서 내린 여자는 2층에 사는 다니구치 노부코다. 신주쿠에서 고급 클럽을 운영하는 마담으로 아파트의 사내들이 모두 탐내는 여자. 가게를 닫고 귀가한 모양이다. 어둠에서 봐도 섹시한 미녀다.
“아, 네…. 뭣 좀 처분할 것이 있어서….”
“아니 한밤중에 처분은 무슨 처분이에요. 어때요, 우리 집에 가서 한잔?”하며 감겨오는 여자에게서 술과 화장품 냄새가 진하다. 노부코가 아키라에게 추파를 보내온 것은 한두번이 아니다. 죽음을 결심한 이밤따라 여자들이 몸을 던져오는 모순에 피식 웃음을 흘린다. 이 웃음을 신호로 착각한 여자가 아예 몸을 파고든다.
“아냐, 내가 출장 전에 급히 정리할 일이 있어서….”
다소 거칠게 몸을 밀어내는 아키라에게 여자가 틀어진 듯 빈정거린다.
“출장? 미국놈한테 붙은 오쿠상(부인)을 만나러 가는 모양이지?”
순간 피가 거꾸로 치솟은 아키라의 주먹이 허공을 돌아 여자의 턱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주먹에서 여자의 턱뼈가 부러지는 느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여자는 머리를 자동차의 범퍼에 부딪히고 기절한다. 분이 솟는다. 이 세상은 내게 조용히 죽음을 맞이할 여유도 주지 않는가?
입에서 가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문득 자신의 죽음이 에리카에게 어떻게 전해질지 궁금해진다. 일기…. 여기 담긴 사연들을 에리카에게 알리는 것이 우리의 인연법이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다나카 에이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대학동창이자 입사동기생이며 에리카와 늘 함께 지내던 착한 친구. 에리카에 대한 사랑이 아키라 못지않으면서도 결국 양보하고 만 어리석은 놈. 불현듯 발을 아파트로 돌려 웃옷을 입고 자동차 키를 챙겨 나온다.
신주쿠 방향으로 차를 몬다. 새벽 길은 텅 비어 있다. 에리카와 함께 듣곤 하던 비발디의 사계 전곡이 거의 끝나갈 무렵 순환고속도로를 내려 신주쿠역으로 다가간다. 도쿄에서 통행인구가 가장 많은 신주쿠역은 24시간 쓸 수 있는 로커가 있다. 여행자용 대형 로커에 일기책들이 든 쇼핑백을 넣고 사옥으로 차를 몬다.
비상구를 통과해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경비원의 모습은 눈에 안보인다. 집무실에 들어가 스탠드의 불을 연하게 켜고 책상 위를 정리한다. 에이지에게 작별인사와 뒤를 부탁하는 e메일을 보내고 간단한 메모와 함께 로커의 열쇠를 봉투에 넣어 에이지의 사무실로 향한다. 계단을 소리없이 내려가는 아키라의 마음에 최초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느껴진다. 에이지의 컴퓨터 키보드 밑에 봉투를 놓은 아키라는 옥상으로 향한다.
옥상 위에 올라 히비야 공원이 보이는 동쪽으로 가니 먼 하늘에 엷은 핑크 빛이 조금 보이고 히비야 공원 모습이 어렴풋이 눈 아래 펼쳐진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중앙분수대, 에리카와 사랑을 속삭이던 꽃 정원….
옥상 끝에 서서 현기증을 누르는 아키라의 눈앞에 에리카와의 첫 데이트를 위해 분수대 앞에서 만나던 여름날이 떠오른다. 피부가 흰 그녀는 얼굴이 타는 것을 막기 위해 하늘색 파라솔을 들고 나왔다. 어린 나이였지만 잘 어울렸다. 파라솔은 어머니 사다코도 여름이면 늘 들고 다녔다. 그러고 보니 두 여자는 닮은 데도 있었던가? 두 여자의 파라솔을 생각하며 시인 나카하라 주야의 이별을 떠올린다.
사요나라, 사요나라.
그대는 그렇게도 파라솔을 돌리곤 해서
나는 너무 어지러웠어
그대는 그렇게도 파라솔을 돌리곤 했지
사요나라, 사요나라….
에리카가 돌려대던 파라솔 위로 쏟아지던 여름날의 햇볕이 눈부셔 아키라는 실없이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 젊고 싱싱하던 여름날…. 그 영광스러운 7월의 여름을 생각하며 아키라는 걸음을 앞으로 내디딘다. 허공을 내려가는 아키라는 실없이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