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종합부품업체인 삼성전기에는 ‘자전거 소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다. 중앙연구소 김재조 소장(50)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자전거’를 생산하는 곳도 아닌데도 김 소장에겐 그런 닉네임이 항상 따라다닌다.
고도기술이 집약된 각종 첨단부품의 기술개발을 책임진 브레인에겐 영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수원 본사 7만5000여평에 달하는 생산현장 곳곳을 누비는 그의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붙여준 ‘훈장’과 같은 별명이다.
김 소장은 “각종 시제품의 생산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1단지 첫 생산라인부터 2단지 끝자락까지 걸어다니는 것이 물리적으로 힘들어 자전거 1대를 직접 사서 수년째 돌아다닌 게 그만 빌미(?)를 제공했다”며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개발을 총책임지는 연구소장이지만 그는 현장을 중시한다. 땀흘려 개발한 부품들이 생산라인에서 제대로 수율이 나오는지, 신뢰성에는 문제가 없는지 등을 면밀히 파악, 개발단계에서 개선하기 위함이다. 김 소장은 이를 마치 곱게 키운 자식을 출가 보낸 후 자식 걱정에 밤잠을 설치는 부모의 심정에 비유했다.
지난 95년 1월 삼성전기에 몸담은 이래 그의 손길을 거쳐 상용화된 제품은 부지기수다. 표면탄성파(SAW)필터·모터속도감지센서·LD·LED·OPC드럼·홀소자·유전체필터·유전체듀플렉서·프런트엔드모듈(FEM)·가스센서 등 일일히 열거하기조차 어렵다.
특히 이들 부품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국산화되지 않아 세트업체들이 비싼 값을 주고 부득이하게 선진국에서 수입해온 것이란 사실.
김 소장은 이에 따라 삼성전기가 세계 1위 부품업체로 발돋움하기 위해 그동안 추진해온 박막사업 등 신규개발 프로젝트를 맡아오면서 국내 부품산업의 수준을 몇단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김 소장은 특히 휴대폰용 핵심 부품인 SAW필터와 DVD플레이어 광픽업의 핵심소자인 LD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휴대폰과 DVD플레이어가 세계시장에서 노키아·소니 등 유수 업체들과 대등한 가격 및 품질경쟁을 벌이는 데 있어 그의 결실인 SAW필터와 LD가 작은 밑거름이 됐다는 확고한 신념 탓이다.
“아쉬움도 많았습니다. 가스센서·OPC드럼 등 일부 부품은 시간이 흐르면서 산업 기술 조류와 부합되지 않아 결국 단종됐지요. 이럴 땐 저의 분신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의 부품개발에 쏟은 열정을 간접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김 소장이 올초 최고경영자로부터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3∼5년후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는 데 필요한 선행기술을 개발하라는 것. 이에 따라 그는 적층세라믹콘덴서·모바일용 소형광저장장치·DVD기록용 고출력LD·광통신용 멤스(MEMS)형 광조절기·메가픽셀급 영상센서모듈 등 선행 부품 기술개발에 다시 혼을 불어넣고 있다.
김 소장은 “그동안의 부품개발은 세트업체에 끌려다니는 형국이었지만 앞으로는 세트업체에 앞서 미래 부품기술을 개발하고 완성해 그들을 앞에서 주도하며 이끌어나갈 생각”이라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자전거 페달을 더욱 힘차게 밟아야 할 것 같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안수민기자 smah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