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의 IT과제](18)세계적 R&D 기지로 거듭나자

 “한 국가가 연구개발(R&D)기지로 부각된다는 것은 선진화된 기술과 학습의 기회를 갖게 됨을 의미한다. 어느 나라 못지 않은 빠른 IT시장 특성을 보유한 우리가 이런 시장 특성을 기술수출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라도 R&D기지로 거듭나야 한다.”

 김화종 강원대 교수가 피력하는 ‘우리나라의 R&D기지화론’이다.

 ‘IT분야를 미래산업으로 설정하고 정보강국으로 성장한다’는 국가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R&D의 중요성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시장규모로는 우리나라보다 작아도 스웨덴이나 핀란드처럼 기술강국으로 우뚝 서있는 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R&D분야에 대한 투자를 서두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근 들어 주변상황을 둘러보면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특히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경쟁국들이 우리나라를 제치고 세계 R&D기지로 부각되고 있고 결국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의 R&D 경쟁력이 뒤처지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일고 있다.

 우선 R&D기지로 중국의 급부상은 우리에게 위기의식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세계적 가전제품회사 필립스는 지난해 중국을 아시아지역 연구 및 개발활동 거점으로 여기고 있음을 공식화했다. 스플룬터 필립스 CEO는 “상하이와 시안 등 두 곳에 연구개발 업무를 집중시키고 앞으로 소규모 연구시설을 이들 도시에 추가로 설치해 전체 연구개발 규모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소니와 에릭슨의 조인트벤처인 소니에릭슨모바일커뮤니케이션스도 중국에 R&D센터 설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중국에서 R&D를 강화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중국은 세계무대 진출을 원하는 국내기업들의 주요 숙제 중 하나로 부각됐지만 최근에는 R&D센터의 적격지로 급부상하면서 지식강국을 꿈꾸는 우리나라에 적지않은 긴장감을 주고 있다. 값싼 인건비와 광활한 시장으로 부각된 중국이 이제는 ‘아시아지역의 연구중심지’라는 보다 근원적인 경쟁자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이은 또 하나의 경쟁국은 인도다. 이미 소프트웨어 분야의 강자로 알려진 인도는 산업자동화와 전원제어장치로 유명한 엘손전자(Eerson Electric)사의 100% 자회사 ENPI(Emerson Network Power India)가 인도지사를 ‘센터 오브 엑설런스(centre of excellence)’로 추진키로 결정한 것을 계기로 R&D 기지로 재조명받고 있다.

 IT강대국을 자부하는 우리나라가 이처럼 중국이나 인도에 밀려 동북아 지역의 R&D 거점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데는 몇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우선 인력양성 문제다. 이단형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장은 “R&D 역량을 글로벌화할 수 있는 인력정책, 외국기업이 국내에 R&D기지를 설립하는 데 필요한 우수 인력 양성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밝혔다. 이 원장은 “R&D는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인데 너무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한 나머지 실적 위주로 연구문화가 형성돼 과거 R&D 성과를 노하우로 이어받지 못하고 개별적인 연구성과로 끝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결국 이같은 문화가 R&D인력의 이탈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국책과제로 추진되는 정부차원의 R&D 중 상용화나 상품화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인 접근이 필요한 분야를 분명히 구분해 한 분야에 꾸준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근 들어 공론화되고 있는 ‘이공계 살리기’ 역시 R&D 인력양성 차원에서 보다 심도있게 다뤄져야 할 일이다.

 둘째, 개별기업의 R&D 투자비중도 지금보다 확대돼야 한다. 윤충한 한국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박사는 “최근까지도 GDP 대비 우리나라의 R&D투자율은 2.58%로, 3.37%를 기록하고 있는 핀란드에 비해 1%포인트 가까운 격차를 보이고 있다”며 “GDP 대비 1%는 실제 어마어마한 격차라는 점을 고려할 때 개별기업의 R&D 투자규모를 늘려 국가적으로 R&D 인프라를 강화하는 것도 선진 외국기업의 R&D센터 유치를 위한 주요 조건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셋째, 외국기업이 국내에 R&D센터를 설립하기 위한 현실적인 조건으로 외국기업의 유치환경 개선도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최준근 한국HP 대표는 “한국에 투자함으로서 비즈니스에 유리하고 다국적기업의 인력을 유치할 수 있도록 근무환경의 개선이 필요할 것”이라며 “언어나 외국인자녀의 취학문제, 서비스 등도 중요하게 개선돼야 할 요건”으로 꼽았다.

 이밖에 R&D에 대한 우리 정부의 시각교정도 필요하다. R&D정책은 장단기적인 계획 속에 선택과 집중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빠른 기술변화에만 급급하고 큰 로드맵 없이 개별적으로 진행되는 경향이 짙다. 장기적인 로드랩을 구축하되 3개월, 6개월 단위의 꾸준한 점검과 수정을 적용하는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IT의 경우 더욱 빠른 속도로 발전하기 때문에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변함이 없지만 적용기술 등 세부 항목에서는 단기적인 접근을 통해 상황에 맞는 변화를 가미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선상에서 산자부가 지난해 발표한 ‘동북아 R&BD 허브구축’ 계획은 차기 정부가 바톤을 이어받아야 할 핵심 과제로 평가받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이미 차기 노무현 정부가 대선공약을 통해 계승의지를 밝힌 내용으로 현실화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R&BD’는 연구개발이 사업화·상용화와 융합돼 진행되는 제4세대 R&D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자칫 넛크래커(nut cracker)속의 호두 신세가 돼버리는 상황을 극복하고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동북아 R&D거점, 특히 연구개발이 마케팅 등 상업화와 융합된 형태로 진행되는 ‘동북아 R&BD 허브’ 구축이 필요한 시점이다.

 현오덕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소장은 “신기술 구현을 위한 전자·반도체·자동차 등 광범위한 주력산업 기반과 생산기술 기반을 이미 확보하고 있는데다 중국에 비해 숙련되고 일본에 비해 값싼 우수인력을 보유하고 있어 홍콩, 도쿄, 상하이 등에 비해 R&BD 여건이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고 평가했다. 현 소장은 “특히 지정학적으로 한국의 위치는 중국의 시장과 일본의 자본 중간에 있고, 향후 남북관계가 개선됐을 경우를 고려할 때도 교통의 중심지로서 잠재력을 갖고 있어 R&D기지와 비즈니스적 관점이 결합된 허브 구축은 향후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중국을 비롯한 경쟁국이 IT인프라 투자나 신기술 도입속도는 우리보다 늦지만 연구개발을 뒷받침할 수 있는 수준높은 과학기술 기반과 관련인력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며 “관련 기반확충과 인력양성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또 다국적기업의 R&D본부에 대한 지원제도를 마련하는 것을 비롯해 △부품소재·IT·BT 등 신규공장 설립형 투자에 대한 지원강화 △‘외국인투자지역’ 지정요건(현재 5000만달러 이상 투자) 완화 △지역산업 진흥과 연계한 입지지원 강화 등을 가능케 하는 제도화 △우수한 인력유치를 위한 외국인 생활편의시설 확충사업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혜선기자 shinhs@etnews.co.kr>

 

 도움주신 분 : 김영민 LG경제연구원 산업기술그룹 박사, 김화종 강원대 교수, 윤충한 KISDI 정보통신산업연구실 박사, 이단형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장, 제프리 존스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 명예회장, 최준근 한국HP 대표, 현오덕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소 소장(가나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