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세계 제조기지창으로 부상하면서 중국을 제외한 동남아지역에 대한 관심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지난해 필리핀에 광디스크 공장을 설립하면서 필리핀이 새롭게 관심을 끌고 있다. 가장 많은 국내업체들이 진출해 있는 카비테 수출자유공단을 통해 필리핀 진출 여건이 어떤지 알아본다.
“가장 좋은 점은 의사소통에 전혀 어려움이 따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필리핀에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어 웬 만한 노동자들도 영어에 능숙합니다.” 카비테 수출자유공단에서 에이스시큐리티라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김영덕 사장의 말이다. 마닐라에서 남동쪽으로 20㎞ 정도 떨어져 있는 카비테는 지난 80년에 조성됐다. 276㏊의 면적에 총 224개 업체가 들어서 있는 카비테는 6만5000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필리핀 최대 공단이다.
이곳에는 한국기업 70개사가 입주해 있다. 94개사가 활동중인 일본에 이어 가장 많이 진출해 있다. 진출 업체 중 37%가 전기전자업체들이다. 주로 일본과 한국의 전기전자기업체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기 때문이다. 카비테에는 일찍이 대륭정밀(현 라딕스), 대덕전자, 맥슨전자 등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중견 전자업체들이 진출해 관심을 모았다. 사출물 업체도 10%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기업들의 진출은 갈수록 늘고 있다. 지난 86년만 해도 2개사에 지나지 않던 것이 95년에는 49개사로 급증했으며 2000년에는 67개사로 늘었다. 투자규모도 지난 2000년에 1억7000만달러를 상회했다. 카비테 수출공단의 수출액은 총 17억달러에 이르고 있으며 이중 국내업체들이 4억8000만달러를 차지하고 있다.
“필리핀은 노동자 한달 임금이 평균 120달러에 불과할 정도로 낮기 때문에 한국에선 수익성 악화로 운영하기 힘든 품목도 수익성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얼티메이트일렉트로닉스컴포넌츠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윤동호 부사장의 전언이다. 그는 또한 “일한 시간만큼 임금을 지불하고 해고시에도 요건만 갖추면 별 다른 규제가 없어 노동의 유연성이 매우 뛰어나다”고 말했다.
이곳에 진출한 국내업체들의 40%는 고임금을 견디지 못해 공장을 이전해온 전기전자 중소업체들이며 30%는 섬유업체들이다. “중소기업들이 이곳으로 몰려드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요.” 맥슨시스템즈의 곽태진 차장은 저렴한 임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수한 노동력이 강점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최근 삼성전자의 대규모 광디스크공장 설립으로 필리핀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는 게 이곳 관계자들의 견해다. 한국투자자협회의 한 관계자는 “카비테 지역은 아니지만 인근의 삼성공장 주변으로 협력사들의 동반진출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젠 제법 규모있는 한국공단의 모습이 갖추어지고 있습니다”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도 없지 않다. “물류 인프라와 금융이 핸디캡입니다. 카비테는 마닐라항과 매우 가깝지만 육상교통체증이 심합니다. 금리도 연 14∼15%대로 높은 데다 현지 은행으로부터의 차입에 어려움이 따릅니다.” 조인호 맥슨시스템즈 사장은 필리핀의 열악한 사회 인프라가 아직은 투자의 걸림돌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의사가 상주하는 공단병원 건립이 시급합니다. 자녀교육도 문제입니다.” 자동차 원격시동 경보장치를 생산해 대부분 미주나 유럽으로 수출하고 있는 에이스시큐리티 김영덕 사장은 교육과 복지에도 애로가 크다고 말했다.
<마닐라(필리핀)=유성호기자 shy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