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의 편지](5)파헤져지는 자살 의혹

 1999년 6월 4일 도쿄 신주쿠역.

 신주쿠의 세이부역에서 JR역으로 가는 길은 짜증난다. 돌을 던지면 닿을 거리인데 길을 두개나 건너야 한다. 혼잡한 인파 속에서 비닐팩의 티슈, 중국여자 마사지 가게 삐라, 고리대금업자 안내문 등 이것저것 나누어 주는 손들이 걸음을 수시로 멈추게 한다. 인도 옆의 화단에는 꽃나무는 없고 홈리스들이 자리를 잡고 포르노 잡지들을 산더미 같이 쌓아 놓고 있다.

 참, 일본도 무지하게 변했네. 애국심 같은 것이야 담배 연기처럼 날아간 지 오래지만 그래도 젊었을 적 사랑하고 자부심을 가지던 정돈되고 살기 좋은 일본이 없어졌다는 허무감이 느른한 몸에서 힘을 더 뺀다.

 에이지는 아키라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에서 깨어나 어제 하루 모처럼 회사에서 밀린 e메일과 서류를 정리하고 오늘 신주쿠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다. 아키라가 남긴 봉투속의 메모에 의하면 열쇠는 신주쿠역 서쪽 입구에 있는 E-83번 로커다.

 개찰구가 있는 지하층으로 내려가니 인파는 지상 못지않게 복잡하다. 공간을 너무 조밀하게 사용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E-83번 로커는 입구에서 가깝다. 열쇠를 넣고 돌려도 열리지 않는다. 가만히 보니 600엔을 넣어야 열리게 되어 있다. 하루에 300엔씩 이틀치가 미납인 셈이다. 그렇다면 아키라가 이 로커에 온 것은 틀림없이 6월 2일. 아마 새벽 일찍 들렀을 것이다. 다시 한번 아키라의 죽음의 무게가 마음을 누른다.

 무슨 유품일까? 차가운 열쇠를 돌리는 에이지의 팔에 작은 소름이 끼친다. 침을 삼키며 로커의 문을 여니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플라스틱 쇼핑백이다. 쇼핑백에는 두꺼운 대학노트가 수십권 들어있다. 얼추 쳐들어보니 대개 만년필로 쓴 일기다. 아, 연간 일기장이구나! 맨 가장자리의 노트에 1960년이라고 쓰여있다. 1960년이라면 중학교 1학년이다. 에이지의 손안에 있는 것은 아키라의 소년기 이래 인생의 기록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삶의 한복판에서 인생을 접은 친구의 일기책들을 들고 있는 에이지에게 비로소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눈물이 갑자기 터지는데 한 손에는 가방이, 다른 손에는 무거운 플라스틱 백이 들려 있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벽쪽을 향하고 속수무책으로 안경테 밑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구석에 있는 편의점의 여자가 저런 멀쩡한 정신병자는 요새 하루에도 몇차례 본다는 양 오래 눈길을 주지도 않는다.

 초로의 중년신사가 길에서 눈물을 흘리는데 본 척도 안하는 아낙네에게 순간 가벼운 배신감을 느끼며 에이지는 일본이 참으로 무지하게 변했다는 것을 오늘 두번째로 느낀다.

 1999년 6월 4일 도쿄 국회도서관.

 일본 정치권력의 소재지 나가타초에 있는 국회도서관은 이용객이 많다. 대다수는 책이나 자료를 열람하러 온 사람이겠지만 구관 6층에 있는 값이 싼 식당이나 매점을 이용하러 오는 사람도 아마 적지 않을 게다.

 신주쿠역에서 지하철 마루노우치선을 탄 에이지는 궁리끝에 국회도서관을 작업의 무대로 삼기로 하였다. 작업이란 아키라의 일기를 읽고 그의 죽음의 내력을 파헤치는 일이다.

 국회도서관은 여러모로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회사에서 누가 부를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원한다면 택시 기본요금으로 갈 수 있는 거리다. 그리고 자료가 많다. 신주쿠역에서 슬쩍 본 일기에는 아키라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의 일들이 써있는 듯하고 따라서 참고자료가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점심이나 커피도 안에서 싸게 먹을 수 있고 이용객이 많아 남이 뭘 하든 상관하지 않으니 이만한 곳이 없다.

 신관 일층 구석의 열람석은 자리도 편하고 비교적 사람이 적다. 에이지는 자리에 앉자마자 금년도 일기책을 펴든다. 아키라가 죽기 전날 일기를 썼는지가 우선 궁금한 까닭이다. 과연 있었다.

 1999년 6월 1일

 오늘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자 마지막 날이다. 수년간 준비하고 정력을 쏟아 넣은 JTT의 분할이 세계에 발표되었다.

 입사시 인사부장을 하던 하세가와의 출현은 참으로 뜻밖이다. 그리고 그의 출현은 이미 썩어오던 내 인생에 종지부를 찍도록 도와준다.

 할아버지가 그립다. 그리고 사랑하던 어머니….

 에리카 사랑했어. 내내 그리워할게. 아버지 먼저 갑니다. 이승에서의 인연은 좋지 않았지만 저승에 가서는 서로 미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죽음을 내린 요코타, 곤도, 사토 자네 세 인간들은 저승에 만나서 내가 다시 심판할 것이다.

 내가 사랑하고 미워하던 일본이여 안녕.

 내가 그리워하고 미워하던 조선이여 안녕.

 간단한 일기다. 심야에 귀가하여 불과 수시간 후에 히비야 사옥에 가서 투신자살하리라고 마음 먹었다면 일기를 길게 쓸 심경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지막 날의 일기를 놓고 볼 때 세가지 의문이 떠 오른다. 첫째, 인사부장 하세가와라니. 하세가와라면 에이지도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사람의 출현이 왜 아키라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게 하나? 둘째, 요코타, 곤도, 사토라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내렸다니 이건 무슨 소리인가? 셋째, 그리워하던 조선이라니? 아키라가 조선인이었던가?

 몇줄 안되는 일기를 읽고 나서 에이지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부호로 그득하다. 아, 그리고 에리카는 어디 있는가? 아키라의 부인 모리 에리카, 아니 후지사와 에리카는 남편 아키라의 죽음에 관하여 알고 있는가?

 6층 다방으로 올라가 커피를 시키고 담배를 빼어 물으니 에이지는 첫번째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이 떠오른다. 에리카의 행방이다.

 국회도서관 안에서는 이동전화를 쓸 수 없어 밖으로 나와 공중전화를 건다. 상대는 전에 데리고 있던 부하 스즈키다. 총무부에 과장으로 근무하는 그라면 에리카의 소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스즈키입니다.”

 “어이, 마침 자리에 있었군. 나 다나카 에이지다. 잘 있었나?”

 “과장님, 아니 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이 사람아, 그냥 다나카상이라고 해.”

 “아 네. 그런데 전화를 주시고 무슨 일이십니까?”

 “그게 말야… 자네 후지사와 경영기획부장 일 알고 있지.”

 “그거야 물론….”

 “자네 아다시피 후지사와군하고 나는 오래된 친구 아닌가. 그래서 그 부인에게 연락이 갔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그렇군요….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스즈키가 무언가를 확인하는 동안 담배를 하나 꼬나문 에이지에게 이미 오래된 일들이 하나씩 기억나기 시작한다.

 “부장님, 저… 부인하고는 이미 이혼을 하였군요. 그래서 회사에서 특별히 연락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 그래…. 알았네. 그럼….”

 그토록 서로 좋아하던 둘이 이혼을 하다니. 도대체 아키라는 그 사이에 무슨 사연이 그리도 많았단 말인가?

 자, 그러면 여기서 다음은 어디로 움직여야 하나? 일기를 계속 읽어볼 수도 있으나 오랜만에 도서관이라고 오니 갑갑하고 우선 나가고 싶다. 망연자실하게 커다란 유리창 밖의 정원을 보는데 꽃이 진 사쿠라나무가 가운데 서있다. 사쿠라….

 “사쿠라는 구니타치가 제일이야.”

 오보에 소리같이 감미롭던 에리카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동대 야스다 데모 사건 이후 친해 진 셋은 졸업 때까지 남자 둘이서 여자를 공유하듯이 허물없이 지냈다. 물론 에리카는 아키라의 여자라는 암묵적인 이해가 있었지만 에리카가 허물없이 생각하고 신뢰하기는 에이지 쪽이 더했을 것이다. 그만큼 에이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소유욕이 없었던 것이다.

 야스다 강당 사건이 있던 다음해인 3학년 봄, 우에노 공원에 야자쿠라(밤벚꽃) 놀이를 가자던 에이지의 제안에 에리카가 도쿄 서쪽에 있는 구니타치시가 낫다고 하여 방향을 바꿨던 기억이 난다. 당시 삼촌인가 하는 친척이 그곳에 산다 하여 간 김에 그 집 앞에서 잠시 기다렸던 기억도 난다. 히토츠바시대학 후문 근처였다. 실로 수십년 전의 일이다.

 머리 나쁜 형사가 어려운 사건 맡은 듯 에이지는 선뜻 결정이 나지 않는다. 허탕치는 셈하고 구니타치에 가보나…. 아니면 도서관에 앉아 아키라의 일기를 읽는 것인데 그게 지금은 썩 맘이 내키지 않는다. 고인의 사생활에 대한 불경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보다 우선 에리카에게 소식을 알리는 게 30년 전 맺었던 우정에 대한 보답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