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선 공장이 어떻게 돌아가던가.” “그게… 공장에 사람이 거의 없더라구요. 가끔 기계가 말을 안들으면 관리인은 그냥 몽둥이로 때립니다. 그럼 생산라인이 다시 돌아갑니다.”
국내 산업계에 자동화 바람이 거세게 불던 80년대 후반 일본 제조업체의 자동화현황을 둘러본 한 대기업 시찰단이 사장한테 보고했다는 실화다. 당시 소니, 파낙 등이 구축한 첨단 무인공장시스템 앞에서 한국기업인들이 받은 충격과 경이로움을 미뤄 짐작케 하는 얘기다.
우리나라에 무인공장 혹은 자동화된 로봇생산기법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지난 87년. 국민의 민주화 요구가 절정으로 치닫던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정부와 기업주들은 당시 민주화 열기와 함께 노사분규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사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70∼8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한국형 경제발전 모델, 정확히 말하자면 저임금 노동력에 기초한 경제성장 전략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재계는 새로운 돌파구로 일본에서 유행하던 자동화 생산기술에 주목했다.
일본은 이미 80년대들어 생산자동화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섰고 특히 일제 산업용 로봇은 자동화의 꽃이었다.
그 즈음 국내 기업주들이 자동화 기술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충 이러했다. “저 기계로봇을 우리 공장에 설치하면 하루종일 쉬지 않고 물건을 찍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골치아픈 강성 노조를 구슬려가며 사업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개도국인 한국에 산업용 로봇이 비교적 일찍 도입된 것은 이처럼 과격한 노동운동을 제어하려는 한국 지배계층의 ‘전략적 공감대’가 주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 미국은 대량생산을 위해, 유럽에선 3D작업에서 노동자를 보호하는 복지차원에서 로봇자동화가 시작된 점을 감안할 때 한국에 산업용 로봇이 도입된 배경은 그다지 자랑스럽지 못한 편이다.
어쨌든 87년 이후 국내서 로봇분야는 갑자기 ‘유망산업’으로 뜨기 시작했다. 정부와 재계는 한국경제의 미래가 자동화에 달렸다는 신념으로 로봇 개발을 밀어붙였다. 이해가 잘 안되면 90년대 초반 본지에서 생산자동화란 단어가 요즘 IT만큼 자주 등장함을 참조하시라.
자동차, 전자분야의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은 모두 사운을 걸고 산업용 로봇개발에 달려들었고 일본의 로봇기술자들은 칙사대접을 받으며 김포공항을 들락거렸다. 이러한 산업용 로봇기술은 도입초기 국내 제조업의 생산성 향상에 큰 효과를 발휘했다. 로봇작업을 위해 각종 부품이 표준화되고 주먹구구식 생산공정도 첨단 컨베이어라인과 자동화기기로 착착 업그레이드됐다.
학력고사 이과계열 수석자가 대부분 제어계측과를 지원하고 로봇관련 공학분야가 상한가를 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그러나 한국의 로봇산업은 출발부터 치명적 결함을 잉태하고 있었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